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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관계주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by 한동훈


사회 심리학자인 허태균 교수는 한국인들만의 독특한 특성으로 관계주의를 언급했다. 여기에서 관계주의란 '타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따라 의견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관계 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말한다.


가까운 예로 직장 동료들끼리 점심을 위해 한 백반집을 방문했다고 하자. 그런데 6명 중 자신을 제외한 5명이 육개장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 본인 혼자 김치찌개를 주문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결국 남들 눈치를 의식한 자신도 하릴없이 육개장을 주문하게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관계주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관계주의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이런 관계주의가 대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곳으로는 바로 학교를 들 수 있는데 오늘날 관계주의는 알게 모르게 아이들 결정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동아리를 선택할 때를 보자. 동아리가 구성되고 나서 아이들에게 "너는 왜 이 동아리에 들어오게 되었니?" 묻는다면 열 중 일곱은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요 혹은 친구가 같이 하자고 해서요."라고 솔직하게 답변한다.


이는 아이들이 급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친구들이 오늘 밥은 맛없다고 같이 건너뛰자고 말하면 본인이 아무리 좋아하는 메뉴라도 기꺼이 한끼를 거르고 만다. 괜히 혼자 먹었다가는 이상한 애로 찍힐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로부터의 관계주의는 아이가 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심지어 일탈행동을 할 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다같이 공부를 안하고 있는데 본인 혼자 공부를 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고 친구들 대부분이 담배를 피고 있는데 본인 혼자서 안 피기도 매우 어려운 법이다. 오늘날 학부모들이 교육환경이나 학군을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는 관계주의를 많이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주의는 친구로부터의 관계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으로부터 받는 관계주의도 있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받는 관계주의도 있다.


가족으로부터의 관계주의는 자신의 진로, 진학, 취업 결정에 많은 영향을 준다. 단적인 예로 한국 아이들이 희망하는 직업이나 장래희망은 순전히 아이들 혼자서 결정한 것이 아니다.


의사, 약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 등 아이들이 원하는 장래희망은 하나 같이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롭기 그지없는데 이는 모두 이런 직종을 얻어서 아이가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부모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부터 받는 관계주의도 있다. 좀처럼 우리가 회식을 할 때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퇴근 시간이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못하고 회사에 머무는 이유도 바로 직장동료인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리더나 상사는 바로 이런 관계주의를 이용해 부하 직원들을 교묘히 통제하기도 한다. 즉 같은 사무실에 직원들을 한데 모아놓고 일부러 퇴근시간을 고시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눈치를 봐서 퇴근을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자기 주장 강한 사원 옆에는 일부러 조용하고 순종적인 사원들만 배치함으로써 사무실의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고 회사 분위기를 권위적이고 엄숙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관계주의가 꼭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사 결정에서 관계주의를 택한 사람일수록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양극단으로 치달을 확률은 적다. 또한 어른들이 내려 준 진로 결정에 있어서도 어른들은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보며 그 길이 가장 합리적이다 판단하여 그렇게 결정을 내려준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큰 굴곡 없이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한 혹시나 관계주의를 의식한 결정이 실패한 결정으로 결론이 났어도 그 책임소재는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점에서 자신은 그만큼 큰 부담이나 자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주체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이 지시하는 대로만 살아서는 결코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실제 과거 세대는 순종적이고 타인의 비위에 맞춰 서만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평생 이렇게 살다 보니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또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고 제대로 된 성찰을 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노년에 와서 남에게 휘둘리기 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평생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조직의 단체문화 탓에 무의미하게 개인 시간을 뺏겼던 사람들은 종국에 와서 끝내 회사로부터 팽 당하며 심한 배신감만 가지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매일 각자가 새로운 외부환경을 만난다. 그리고 그 외부환경을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하고 이를 자신의 유전적 특징과 결합시켜 해석하고 강화하면서 그 사람 특유의 성격과 특성, 가치관은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개인의 성격과 특성, 가치관은 저마다 고유한 것인데 현재 우리는 관계주의에 빠져든 나머지 자신이 내려야 할 선택을 타인으로부터 강요받거나 혹은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타인이 선택하고 결정 내려준 길은 설령 그 길이 최선이었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길이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자신의 기질에 따라 자아를 실천할 때 최고의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삶의 선택을 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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