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또 다른 성장
어느 날 다니던 회사에서 친인척이 대거 기용되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직원들의 공간은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조카여도 일을 배우고자 하는 새내기들은 그나마 수용할만했지만,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60대의 손위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함은 이해의 범위를 넘었다. 매 시간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 일반 직원들은 하나 둘 떠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팀에도 조카가 들어오게 되었다.
30대를 훌쩍 넘겼지만 어디서든 정착하지 못하는 조카를 사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고, 대표는 언제나 내가 원하던 후임이 생긴 것이니 좋은게 아니냐며 토를 달 수 없게 일축시켰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사회인으로, 직장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가르쳐야 했고, 하다못해 전화 예절까지 알려줘야 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들도 전혀 숙지가 되지 않아 매일 처음 접하는 일인 듯 다시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사무직이 처음이라며 스스로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아주 뿌듯해했다.
보통의 언어로는 이해가 되는 않는 그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인내심의 단계를 넘어섰다.
말도 거칠고 폭력적인 그를 볼 때면 겁이 났다.
조카가 입사 전. 대표님과 너무 가까운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고 했던 나의 의견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1년만 이곳에서 일을 배우고 다른 곳으로 보낼 거란 말에 나는 아주 위험한 위안을 하였다.
직원들의 공간에서 마치 자기가 대표인 듯 행세를 하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다.
업무처리가 되지 않는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은 출근 후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행이 안되는 상황이라 누구 하나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것에 화가 난 그는 내 책상을 발로 차며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그때의 공포감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음을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대표는 사건으로 발생되기 전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고용인에 불과한 나는 그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증상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그가 어느 정도로 사회생활이 떨어지고, 자기만의 사고안에 고립되어 보편적인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복용하기 시작한 두통약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사건 이후 얼굴에 틱 현상이 나타났고, 공황증상이 시작되었다. 출근길 버스에만 오르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서울 진입을 알리듯 지나는 터널 안에서는 가슴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조카가 사람되기를 기다리는 1년 사이에 나는 죽을 것 같아 병가신청을 하였다.
내게 병가의 의미는 '조카랑은 못해요!'였고, 그 의미를 회사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려면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7년동안 일을 하며 외부 일정이 많은 대표를 대신해서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큰 착각을 했다. 어떤 조건도 혈육 앞에서는 잣대로 삼을 수 없었다.
나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한 회사의 대표가 가진 권력 앞에 무모한 도전을 하였고 철저히 폐배하였다. 그렇게 그곳을 떠나왔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의 의미를 그때처럼 뼈저리에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아무리 업무처리를 잘했어도, 그리고 그가 아무리 무능력했어도 대표 입장에서의 선택은 조카일 수밖에 없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