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문화가 있는 날, 그리고 방탈출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날
‘방탈출 게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그 때의 나는 파릇파릇한 1년 차 회사원이었다. 그 말을 듣기까지는 과정이 좀 있었는데, 다소 길지만 일단 써보려고 한다.
회사의 특성상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의무적으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기록을 남기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상사의 지시로 문화가 있는 날을 담당하게 된 나는 정말 고민이 많았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위도 아래도 만족하고, 기록으로 남겨도 보기 좋을 것인가..
처음에는 간단하게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영화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를 고르는 건 2~30대의 젊은 직원들인데, 그 영화는 5~60대의 윗분들 취향에 맞아야만 한다. 고민 끝에 두 개의 영화를 선정해 반반 나누어서 보자고 제안했지만 대차게 까였다. 결국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는 없지만 정치색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이를테면 박스오피스 3~4위 정도에 랭크된 무난한 영화를 보러 갔다.
원래 조용히 앉아서는 30분도 못 있는 성격이라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취향에 맞지도 않는 영화를 보는 건 고역이었다. 내 돈 내고 간 거라면 과감히 돈을 포기하고 시간이라도 아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심지어 영화가 끝난 후에는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눈다는 명목하에 술자리까지 마련해야 했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그래도 이번 문화가 있는 날은 이렇게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래서 그다음 문화가 있는 날에는 아예 내가 좋아하는 걸 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독서 토론. 각자 문화가 있는 날까지 책 한 권씩 읽고 와서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기획이었다. 이거라면 굳이 밖에 나갈 필요도 없고, 회의실에서 감상을 나누기만 하면 되니까 퇴근도 늦어지지 않겠지!라는 계산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책을 아주 좋아해서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굳이 그 달에 책을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감상을 나눌 수 있었다. 일석이조라고 생각했고, 동료 직원들의 반응도 좋았다. 기획안을 제출했고 무난하게 통과되었다. 단, 일부가 수정되어서.
일단 독서 토론을 나눌 장소를 섭외해야 했다. 그것도 조용히 분리된 공간으로. 그런 공간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회사에서 먼 곳이면 오가는 시간이 있어서 퇴근이 늦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했다. 결국 회사 인근의 구옥을 개조한 듯한 카페를 두 시간 정도 대관하기로 했다.
자주 가던 카페라서 차와 평소에는 없는 다과까지 준비해 주셨고, 무난하게 독서 토론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직원이 읽은 책 속에서 기어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낸 상사 덕분에 독서 토론은 정치 토론으로 변질되었다. 열띤 토론이 끝난 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술과 노래방 코스로 이어졌다. 아, 망했다.. 회식을 피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그래도 이렇게 또 한 번의 문화가 있는 날이 지나갔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은 어쩌면 그렇게 빨리 찾아오는 걸까. 문화가 있는 날을 기획하면 할수록 새로운 기획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다. 문화, 문화란 무엇인가..를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아는 것 안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시간 내내 조용히 앉아있어야 하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지만 떠들썩하게 웃을 수 있는 연극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평일 연극은 시작 시간이 늦으니 끝나고 회식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연극이라는 주제만 정해놓고 신입 직원에게 문화가 있는 날과 어울리는, 즉 윗분들도 크게 불만 없이 볼 만한 연극을 고르라고 했다.
평소 연극을 즐겨 본다는 신입 직원이 고른 건 아주 가벼운 코미디 연극이었다. 연극은 시야를 가리지 않는 맨 앞자리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둘이 매달려 예매도 완료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성공이다!라는 자신이 들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윗분들은 연극을 하는 내내 떠들썩했다. 그것도 아무 때나 떠들썩했다. 배우가 대사를 하면 큰소리로 딴지를 걸었다,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 '저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봐라.'는 말에 배우들이 당황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연극이 진행되는 90분 동안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예의 없는 관객의 일부라니 자괴감도 들었다.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도, 즐거운 관람을 망친 관객들에게도 모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이날도, 그 늦은 시간에도, 회식은 빠지지 않았다. 결국 이래저래 망했다.
지난달의 문화가 있는 날을 생각하니 도저히 개방된 곳,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하는 곳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입 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는 곳, 무엇을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곳에서 문화가 있는 날을 보내려고 고민했다. 그때 신입 직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 지난 주말에 여자친구랑 방탈출 게임을 하러 갔었는데요. 그건 저희끼리만 들어가서 하는 거니까 좋지 않을까요? 한 방에 네 명씩 나눠서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방탈출은 길어도 한 시간 안에 끝나요.”
방탈출 게임이라는 말은 그때 처음 들어봤다. 세상에는 별게 다 있구나. 굳이 내 돈을 내고 갇히러 들어간단 말이지? 근데, 그게 재미있나? 이런 의문을 가진 내게 신입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여자친구랑 할 때는 싸웠어요. 서로 너무 못한다고.. 근데 나오니까 또 하고 싶더라고요. 머리 쓰는 재미도 있고.”
호기심이 생겼는데,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 기획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상사에게 이번 문화가 있는 날 기획은 신입 직원에게 맡겨보자고 제안했고 통과되었다. 방탈출 카페와 테마를 조사해 한 방탈출 카페를 통으로 예약한다는 야심찬 기획을 제출하고 의기양양했던 신입 직원이었지만, 이 기획은 문화가 있는 날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반려되었다.
윗분들은 굳이 돈을 내고 머리를 쓰러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기획에 찬성 표를 던진 건 많아도 30대 상사들까지였고, 그 위로는 굳건히 반대했다. 당연하지만 위로 위로 갈수록 목소리의 힘도 커지니 이 기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기획안 속 방탈출 게임은 묘하게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방탈출.. 방탈출 게임이라..
평소 추리소설이나 추리 만화를 즐겨 읽고, 게임을 좋아했던 나라서 솔깃했을 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 답이 적혀있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답이 적혀있지 않은 문제를 풀러 간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신입 직원은 실패했다지만, 어쩌면 나는 좀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친구 E에게 넌지시 방탈출을 하러 가자고 권해봤다. 이때의 선택이 이후 몇 년 동안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낼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몇 번의 문화가 있는 날을 거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획했던 열몇 번의 문화가 있는 날은 정말 무난했다. 누가 봐도 ‘그 정도면 괜찮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되었다. 당연히 무난하게 통과되었고,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크게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다.
그런데 단 한 번, 신입 직원에게 맡긴 그 한 번, 유일하게 반려되었던 그 기획은 정말 크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그 직원이 처음 방탈출을 했다던 에피소드며 어떤 방탈출 카페를 제안했는지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정말 놀라운 일들로 이어졌다.
당연한 것만 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5~60대 나이의 상사에게 ‘방탈출 게임’을 하러 가자고 제안한 신입 직원의 기획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당돌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 되는 것만’ 하던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발상과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직원의 제안으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실패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성공보다 더 값진 실패도 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패가 내 인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그때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