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방탈출 게임에서 살짝, 내일을 엿보다

EP2. 첫 방탈출, 그리고 이런 게 방탈출?

by 탈출의 정석

친구 E와 방탈출을 하러 가기로 정하고 처음으로 할 테마를 고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전에 신입 직원이 제출한 기획안 속 방탈출 카페의 테마를 하러 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왕이면 처음인데.. 우리 취향에 맞는 테마를 하러 가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방탈출 카페의 홈페이지에서 테마 정보를 보면 일부러 숨기고 있는 매장을 제외하면 해당 테마의 장르도 알 수 있고, 매장에 따라서는 장치와 자물쇠의 비율을 공개하는 곳도 있다. 방탈출 테마의 정보와 평가만을 모아놓은 사이트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온라인 방탈출 카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몇 번 검색만 해보면 그 매장, 그 테마의 평을 손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방탈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알 수 있는 건 매장에서 제공하는 몇 줄 안 되는 테마의 시놉시스와 난이도 정도였다.


그래도 열심히 몇 군데 매장을 골라 시놉시스를 읽어본 끝에 난이도가 쉬우면서도 취향에 맞는 테마를 찾아냈다. 평소 추리소설을 좋아하던 우리가 고른 테마의 시놉시스는 '산타가 아이들을 해치고 있으니 이를 막아야 한다!'라는 것. 긴장감 있고 흥미롭지 않을까? 기대감에 가득 차서 예약을 했고, 해당 날짜, 해당 시간에 방탈출을 하러 갔다.






그렇게 열심히 서치하고 선택한 테마인데, 가자마자 미처 못 본 정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고른 테마는 전에 신입 직원의 기획안에서 봤던 것처럼 60분 테마가 아닌 45분 테마로 시간이 1/4이나 적었고, 그런데도 금액은 한 사람에 20,000원으로 60분 방탈출 테마 금액과 비슷했다. 시작부터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재미있게 하면 된다며 애써 합리화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방탈출 테마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다. 자물쇠에 대한 설명, 3회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힌트에 대한 설명, 스토리에 대한 설명, 주의사항까지. 주의사항은 휴대폰 등의 전자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스포일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고, 이 모든 내용에 동의한다는 서약서에 서명까지 하는 거창한 의식 끝에 드디어 방탈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직원이 내민 안대를 쓰고 앞사람 어깨를 잡고 직원이 이끄는 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조심조심 따라 걸었다. '제가 나가면 안대를 벗고 게임 시작하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직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을 뜬 나는 어느 허름한 방 안에 있었다.






벌써 몇 년 전에 했던 테마라 기억은 여기에서 일단 끊긴다. 첫 번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거기까지 기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 걸까. 단, 그때 느꼈던 막막함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 방 안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아서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무언가 발견하면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첫 번째 문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힌트를 썼던 문제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오래도록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의 답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문제가 얼마나 대충 만든 건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이 너무 컸던 탓일까. 설마 이건 아니겠지..의 '이거'가 답이었다.


결국 처음으로 했던 테마는 힌트 세 개를 모두 사용했는데도 모든 문제를 풀 수 없었고, 시간이 종료되었을 때 들어온 직원에 의해 밖으로 내보내졌다. 두 명이 45분을 즐기기 위해 쓴 돈은 40,000원. 그 정도의 돈을 쓸 만큼 가치 있는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고, 그래서 허무해졌다. 방탈출... 이게 방탈출인가.. 이게 정말 재미있는 걸까...






그런데 내내 방탈출에 대한 기억이 머리를 맴돌았다.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에서였을까? 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은 성공하고 싶다는 오기 비슷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던 탓에 함께 했던 친구 E에게는 도저히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낼 수 없어서 이번에는 친구 J를 꼬드겼다. 다행히 J도 방탈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덕분에 손쉽게 넘어왔고, 또다시 방탈출 테마를 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가본 방탈출 카페가 하나밖에 없었던 탓에 또 같은 방탈출 카페의 테마를 고른 것이다. 그것도 시놉시스가 흥미롭다는 이유로 난이도가 제법 높은 테마를... 또 45분에 40,000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재미있었다. 첫 번째 방의 인테리어와 몇몇 문제들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이다. 문제도 전보다 많이 풀었고, 마지막 방에서 한두 문제를 남기고 아쉽게 실패했다. 이 마지막 문제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정말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이 정도면 다음에는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조금은 생겼다. 그래서 비슷한 난이도의 테마를 골라 J와 한 번 더 하러 갔고 또 실패했다. 그렇게 J도 방탈출에 흥미를 잃었다. 결국 또 같이 도전할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방탈출의 첫 성공은 고사하고 도전 자체도 멀고도 험했다. 나는 취미를 공유할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렇게 비싼 취미를 함께 하자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만약 첫 번째 도전에 45분 테마가 아닌 60분 테마를 골랐다면 어땠을까? 만약 두 번째 도전에 취향에 맞는 테마가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난이도의 테마를 골랐더라면 어땠을까? 그 테마에 성공해서 꾸준히 J와 방탈출을 하러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쉬운 테마임에도 실패해서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고,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또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정답이었을지는 결국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첫 번째 방탈출을 함께 했던 친구 E, 두세 번째 방탈출을 함께 했던 친구 J와는 그 이후 무려 1년 여의 시간 동안 방탈출을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방탈출을 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나 역시 방탈출에 대한 관심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금 사그라졌다.






시간이 흐른 후에 과거의, 특히 실패했던 선택을 돌이켜 볼 때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뿐이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마냥 아쉬웠고, 후회가 맴돌았다. 돌이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탈출에 실패했으니 분명 그때의 선택은 성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몇 번의 실패로 방탈출을 하자는 말도 꺼내기 어려워졌으니 더더욱 그랬다. 만약 이대로 방탈출을 접었다면 그저 실패의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1년 여의 시간이 지난 후, 또다시 E, J와 함께 방탈출을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방탈출을 함께 해오고 있다.


아주 자그마한 실패의 기억이지만, 이를 그저 실패로 남기지 않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내가 어렵다고 생각했을 뿐.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공의 기억으로 덧씌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패'를 이후 성공을 위한 '경험'이었다며 이름표를 바꿔 달아 줄 수 있다. 만약 또 성공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성공을 위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잠시 기억의 한편에 담아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담아놓은 기억은 '경험'이 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된다.


성공의 기억으로 덧씌우고 싶었던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성공이 절실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방탈출에의 관심의 불씨만 살려놓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방탈출 게임에서 살짝, 내일을 엿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