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짜릿한 성공의 맛, 방탈출에 빠지다
같은 취미를 공유했던, 그렇지만 그 취미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며 다소 소원해졌던 친구 H와 K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는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번뜩! 하고 뇌리를 스친 게, 어쩌면 이게 방탈출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공유했던 취미도 방탈출과 아주 다른 맥락은 아니어서 말을 꺼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나의 제안에 다행히 두 명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테마를 정말 잘 골라야 한다는 고민에 빠진 나의 뇌리를 스친 건, 전에 방문했던 방탈출 카페의 대기실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였다. 최소 인원 3인에 무려 90분짜리의 대형 테마! 마침 나를 포함해 세 명이다. 45분 안에 탈출하는 건 어려웠지만, 90분이나 있다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테마를 제안했고, 두 명 다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 테마의 난이도가 5라는 건 까맣게 몰랐다. 여전히 중요한 부분은 하나씩 빼먹는 덜렁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주의사항을 듣고, 동의서를 작성하고, 안대를 쓴 채 직원에 이끌려 테마룸으로 입장했다. 걱정 반, 기대 반, 아니 사실 걱정이 훨씬 컸다. 방탈출에 성공한 경험이 제로였던 나와 방탈출 자체가 처음인 두 명의 조합. 쉽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도 실패하면 더 이상 방탈출은 없다! 고 다짐하고 왔다. 정확히는 더는 방탈출을 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조건 성공해야만 했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부터 쉽지 않았다. 특정 지식을 요하는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문제였는데 세 명 다 문외한인, 사실 이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분야였다. 어떻게든 풀어보겠다며 끙끙대다 결국 첫 문제부터 힌트를 썼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당연히 이번에도 망했다... 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했던 테마가 좀 특이했다. 90분이라는 플레이 타임도 범상치 않았지만 최대 10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는 이 테마의 문제는 '병렬식'이었던 것이다.
/ 여기에서 잠깐, 방탈출 테마 문제의 '직렬식'과 '병렬식'이란 무엇일까. 한 문제를 풀면 단서가 나오고, 그 단서로 다음 문제를 푸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행 방식이 직렬식이다. 반면 한 번에 여러 개의 단서를 주고 여러 개의 문제를 동시에 풀어나갈 수 있는 진행 방식이 병렬식이다. 병렬식의 장점은 한 문제에 막히면 일단 다른 문제를 풀어도 되고, 여러 명이 갔을 때는 나눠져서 풀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방탈출에는 직렬식 테마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고, 특히 방탈출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는 거의 모든 테마가 직렬식이었다.
무조건 첫 번째로 풀어야 했던 문제를 힌트로 해결했을 때 단서가 와르르 쏟아졌고, 지금부터 어떤 단서를 들고 어떤 문제를 풀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몫이 되었다. 첫 번째 문제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단서를 하나씩 들고 흩어졌다. 잘 안 풀릴 때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아예 다른 단서를 들고 다른 문제를 풀기도 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끝이다!라는 걱정이 없어서인지 훨씬 부담 없이 풀어나갈 수 있었다.
정신없이 문제를 풀어나가다 보니 옆에는 이미 해결한 문제의 단서들이 쌓여갔고, 우리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지금은 방탈출 테마를 하다 보면 진행률을 확인할 수 있는 테마들이 많은데, 이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남은 문제가 한 개인지, 열 개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평소와는 다른 90분 테마라 감도 전혀 없었다. 고난도 문제들 사이에서 90분 동안 집중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느 문이 열렸을 때 세 명 모두 동시에 느꼈다. 아,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여기가 마지막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그 방의 마지막 문제는 아직도 생생하다. 자물쇠로 가득했던 그 테마의 마지막 문제는 장치였고, 그 장치를 작동했을 때 문이 열린 순간을, 그 순간의 쾌감을 잊을 수가 없다. 칠전팔기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삼전사기의 끝의 성공은 달콤했다. 난이도 3도 4도 실패했던 내가 처음으로 성공한 테마가 난이도 5라니, 믿기지 않았다.
소요시간 82분 30초 / 남은 시간 7분 30초 / 사용한 힌트 3개
나의 일기에 남은 소중한 첫 성공의 기록이었다. 그 일기에는 이 날의 기쁨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지금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성공했을 때만 받을 수 있다는 폴라로이드 사진도 이때 처음으로 받아봤다. 물론 이 사진 역시 나의 사진첩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성공은 사그라지던 방탈출에 대한 관심의 어렵게 살려놓았던 불씨에 활활 기름을 부었다. 성공의 달콤함을 공유하면 E와 J도 다시 방탈출에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방탈출 하러 가지 않을래?' 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하는 대신 짜릿한 성공의 경험을 열렬히 공유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나도 다시 한번 해볼까?'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또 한 번 테마를 고를 차례가 되었다. 여기에서 과거의 실패를 조금이나마 경험으로 살릴 수 있었는데, 45분 테마 대신 모르는 매장이라도 60분 테마를 고른 것이다. 얼마 없는 정보라도 열심히 서치 해서 어느 정도 취향에도 맞고, 평도 좋은 테마로 선정했다. 그 결과 E와 J에게도 첫 성공의 기억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나와 함께 방탈출길을 걸어줄 굳건한 메이트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방탈출을 처음 알게 된, 첫 도전에 성공의 맛을 본 K는 나보다 더한 방탈출 마니아가 되어서 몇 년 전에 이미 방탈출 횟수 600번을 넘긴 괴수가 되었다...
흔히 방탈출을 하지 않는 친구를 방탈출로 끌어들이는 걸 '영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 방탈 카페에는 '친구 영업용 테마 추천해 주세요!'라는 글도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방탈출 테마 중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일부 '혼방가'가 있는 매장을 제외하면 2인 금액을 지불해야 하고, 애초에 물리적으로 혼방이 불가능한 테마도 많다. 그래서 방탈출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흔히 '방메'라고 부르는 방탈출 메이트가 꼭 필요하다.
나 역시 방메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몇 번의 실패 후라서 초조해졌지만 이때 다짐했던 것은 절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는 것이었다. 물론 한 번 더 권했어도 같이 해주었을 수도 있고, 그게 성공으로 이어져서 방메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리스크가 있었다. 내 입장에서도 계속 권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래서 취한 전략은 내가 직접 권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영업하고 싶었고, 다행히 주효했다.
어떤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는 저마다 분명 다를 것이다. 실패를 겪어봤으니 두렵지 않다! 며 곧바로 다시 시도할 수도 있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 더 철저히 준비해 리스크를 줄이고 도전할 수도 있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중요한 건 그때의 상황에, 그리고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는 게 아닐까. 나는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후자의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 결과, 원하는 대로 실패의 기억을 멋지게 성공으로 덧씌울 수 있었다.
드물게, 다음 에피소드에 대한 자그마한 예고를 해볼까. 앞서 나는 친구를 영업하기 위해 '얼마 없는 정보라도 열심히 서치'했다. 그런데 정보가 정말 얼마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보를 남겨보겠다! 는 생각을 했다. 내게 아주 큰 변화를 안겨 준 그 '정보의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에피소드에서 풀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