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단약후기➁ | 참을 수 없는 진단의 가벼움

by 김헤니

“네, 우울증이고요. 우울감은 제가 진료하는 환자 10명 중 7~8등일 정도로 가볍지 않아요. 1년 정도 약 먹으면 됩니다.”


두 시간 넘게 12월 말의 추위를 뚫고 찾아간 병원에서 교수님은 몇 가지 간단한 검사 후에 세 문장으로 진단을 끝냈다. 매번 대학병원까지 오기 힘드니까 동네 병원을 추천해 줄 테니 거기서 약을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전형적이고 보편적으로 정신과 진단을 받은건데, 마음의 병 초짜였던 나는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진단해 주신 분은 아빠의 먼 지인으로서, 먼저 마음이 고장 나버린 동생을 1년 넘게 면밀하게 치료해 주셨었다. 아파진 원인을 분석해 여러 가지 치료 기법을 다방면으로 적용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식이었고, 그 와중에도 약물치료는 최대한 미뤄두자며 수면제 한알도 함부로 처방해주지 않았다. 그때는 약 부작용에 자세히 몰랐음에도 우리 가족 모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동생이 어느 정도 괜찮아 졌을 때, 교수님은 이제 환경 자체를 바꿔야 치료가 마무리 될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의 직장 발령으로 부모님과 동생은 이사를 갔었고, 나는 대학을 마친 후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동생은 평소에 좋아하고 잘 따르던 내 곁으로 오고 싶어했다. 그바람에 평생 고대해 오던 나의 자취생활은 4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자매가 함께한 2년 동안에 나는 미련하리만큼 나를 돌보지 못했다.


지독하게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동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출석과 학점을 사수했고 임용고시 준비도 틈틈이 했다. 그 와중에 내 생활비는 내가 부담하고 싶어서 저녁에는 입시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많이들 하는 자체 휴강 한번 없이, 매사에 영혼을 끌어모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벌칙이라도 받기로 한 사람처럼 살았다.


오히려 나 혼자였다면 힘들어도 보람찬 나날들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 초 단위로 살면서도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동생의 마음을 선순위로 놓다 보니, 원래도 성격상 남을 위해 늘 양보했던 내 마음은 속절없이 구석으로 내몰렸다.


내 마음에 병이 나게 된 이유가 그 2년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생이 완전히 건강해지고, 대학 졸업 후 따로 살게 된 후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던 그 때의 기억들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아마 나는 은연중에 동생 이사의 원인을 제공한 교수님한테 책임을 묻고 싶었던 것 같다.


나한테는 너무한 나날들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생이 건강해졌으니 교수님이 사과만 하면 배포 있게 용서해 줄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콕 집어서 ‘선생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저 많이 힘들었어요’ 하고 전달하지 못했던 탓일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내게, 지난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 의아한 표정과 ‘아, 네’ 하는 가벼운 대답만 돌아왔다.


세심하게 동생을 치료해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물론 각자 병을 진단받을 당시에 동생은 미성년자였고 나는 성인이었으며, 마음의 병을 일으킨 원인도 무게도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그분이 무심한 의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병이 낫는데 교수님의 태도가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아니 우울한 정도가 가볍지는 않다면서요. 선생님 말씀은 이보다 더 가벼울 수 없겠는데요..’



입가에 맴돌던 원망을 삼킨 채 나의 첫 정신과 진료는 그렇게 끝이났다. 멍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1년 동안 약 잘 먹으면 된다는 말만을 되뇌며, 병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찝찝한 기분을 자꾸만 모른척했다.


이때 느낀 뭔지 모를 찝찝함은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한 불길함에서 왔던 것일까. 이날 이후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힌 정신과 약물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아참, 그리고 오진이었다.




조울증 단약후기: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잘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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