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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괴설 Nov 28. 2022

2022 명륜동 오발탄 : 사랑니 발치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

인류의 진화 (발치 D-30만 년)


기원전 30만 년 전 지구에 태어난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왔다.

인류는 네 발에서 두 발로, 엄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진화한 끝에 생명체의 정점에 섰다.

이렇게 지구를 정복하게 된 호모 사피엔스는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진화를 하고 있다.

인간이 여전히 진화가 진행 중이라는 증거로는 신체에 남은 '흔적기관'들이 있다.

흔적기관은 진화가 거듭된 끝에 생존에 필요가 없어진 신체 부위로,

꼬리뼈, 편도선, 야콥슨 기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급진적인 진화는 역풍을 맞이한다 했던가.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서 흉악하며, 공포스러운 흔적기관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바로 사랑니라는 존재이다.




재앙의 씨앗 (발치 D-6년)


21세기를 살아가던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진화를 하고 있었는데,

19살 무렵, 엑스레이를 통해 재앙의 씨앗을 목격하게 된다.

나란히 대열한 치아들의 양 측, 마치 와불처럼 드러누운 두 개의 어금니.

그러나 와불의 자애와는 거리가 먼 흉측함.

두 어금니는 언젠가 재앙을 불러올 씨앗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가볍게 문제를 미래로 전가했다.

다가오는 고난을 모른 척하는 일은 어찌나 쉬운지!


그러나 어느 날, 거울로 입안을 들여다보던 때에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새 많이 올라와 옆의 어금니에 기대기 시작한 사랑니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악마의 표면이 검게 변해 있었다.

사랑니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축하해. 드디어 때가 됐어. 6년 전의 네가 보낸 선물이야.

물론 반품은 절대 할 수 없어.




발치 예약 (발치 D-21)


발치를 결심하고도 이런저런 핑계로 6개월이 지났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가 좀 한심하다 느껴졌다.

그래서 홧김에 바로 발치 예약을 했다.

감정은 충동을 낳는 법이다.


물론 홧김에 내린 판단과는 별개로 평이 좋은 이른바 ‘공장형’ 사랑니 치과를 티켓팅 해서 예약했다.

한순간의 감정에 내 잇몸을 아무데서나 찢을 순 없지.




발치 (D-Day)


11월 23일, 결전의 날이 왔다.

점심은 돈가스를 먹기로 결정했다.

발치하면 튀김 종류도 못 먹을 거라 생각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돈가스 사줄게’를 스스로 구현해 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치는 사기가 통할 리 없지만 속아 주는 수밖에.


오후 2시 반, 치과가 위치한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난 홍대 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에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겠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빨리 들어가긴 싫었지만 치과 앞에서 서성이긴 또 부끄러워서 곧바로 들어갔다.

역시 감정은 충동을 낳는 법이다.


들어가자마자 엑스레이를 찍었다.

수없이 본 내 치아들의 엑스레이 사진, 역시나 흉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과 상담이 시작됐다.

마치 로켓단 같은 발성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멋졌다. 나도 로켓단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몇 개 뽑으실 건가요? 오늘은 하나요.

어느 쪽부터 뽑으실 건가요? 어디가 좋을까요?

어차피 둘 다 뽑아야 해요. 그럼 오른쪽이요.

마취는 해보셨을 테고. 네.


상담이 끝나자마자 마취를 시작했다.

여기서 나의 마지막 이성이 빛을 발했다.

나는 사랑니 발치 과정 중 마취가 늘 가장 두려웠는데 이곳은 무통마취를 해주는 곳이었다.

후기들을 수십 개 찾아보길 잘했다 싶었다.

무통마취는 진짜 아무 느낌도 없었다. 바늘이 꽂힌 상태로 40초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 빼면.

그런데 이 무통마취, 어릴 때도 많이 했었는데 그때는 이것도 무지하게 아프다 생각했었다.

기술이 발전한 건지 내가 성장한 건지.

이럴 때는 내가 무뎌진다는 게 좋은 것 같다.


마취가 끝나고 나서는 30분가량 기다렸던 것 같다.

내 자리에는 나무늘보 인형이 하나 있었다.

나무늘보…솔직히 나무늘보는 정말 멋지다.

치과 대기실에 수많은 미니언즈 인형들이 있었는데, 나의 나무늘보는 그런 외눈박이 허접들과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의사 선생님은 개방된 4개 정도의 자리를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수술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4명을 번갈아가며 수술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마취를 꽂은 상태로 누군가는 잇몸이 절개된다.

이거 완전 공장이로군. 서브웨이 같기도 하고.

파마산 오레가노 빵을 가르고, 잇몸을 가르고

스위트 칠리를 뿌리고, 지혈제를 뿌리고

야채 어떤 거 빼시나요? 어느 쪽 사랑니 빼시나요?

올리브 빼주세요, 오른쪽 아랫니 빼주세요.


드디어 나의 차례가 시작됐다. 15:54분이었다.

눕자마자 얼굴에 하늘색 천이 드리워지고, 곧바로 드릴이 내 입안을 갈았다.

무언가 갈리는 소리만 크고 느낌은 없다.

드릴 소리가 멈추더니 입 안으로 무언가 또 들어온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각목이 부러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꽤 흥미로운 소리였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후기 보면 인형을 잡고 있었다던 사람도 있던데.

갑자기 손이 허전하게 느껴져서 묵주 반지라도 만져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에…


입 옆으로 실이 느껴지더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15:57분이었다.

3분 만에 끝난 것이다.

세상이 날로 빨라진다고 하거니와, 신체를 잘라내고 치아를 부수는 일이 컵라면 익는 시간보다 짧다니.

세상을 마주 한지 25년이 걸린 사랑니는 180초 만에 차가운 철판 위에 두 동강이 난 채로 놓였다.

함께해서 좆같았고, 의료폐기물로 영영 사라져버려라.




약 처방과 진통제 (발치 D+1시간)


거즈를 물고 치과를 나와 가까운 약국으로 향했다.

접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이 나왔다.

이건 항생제, 이건 진통제, 이건 더 쎈 진통제…

약을 잘 먹어야 염증이 안 생겨요.

이건 헥사메딘이라고 이걸로 소독하고, 진통제는 지금 한 알 먹어요.

거즈를 문 상태로 어떻게 약을 먹어야 할지 몰랐지만 물어볼 수도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뭐, 살고자 하면 뭐든 못하겠는가. 어찌저찌 잘 넘겼다.

아프지 않으려고 수술을 하고 그래서 아프고 또 아프지 않으려고 약을 먹는다.

모순적이다.




귀가 (발치 D+2시간)


오른손엔 아이스팩, 왼손엔 진통제.

도저히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혜화로 가는 택시를 불렀고 금방 탈 수 있었다.


대학로 맞으신가요? 에.

연대 앞으로 가도 될까요? ㅔ.

네비도 그렇게 가라고 하네요. ㅇ.


어금니를 뽑고 피 흘리는 사람과 택시. 그야말로 오발탄이었다.

송철호와 김원석. 어금니를 발치한 택시 탑승자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목적지를 알고 있다는 거겠지.

아니. 알고 있는 게 맞나?

혜화 집에 가서 피가 멎으면 그 뒤엔 무엇을 할까. 집은 철호도 있었지 않나?

내년엔 내가 뭘 하고 있을까. 졸업하고는?

철호나 나나 사실 똑같을 지도 모른다.

시대의 오발탄! 전공에 맞춰 빈 롤이라고 칭해도 그럴싸하겠다.


겁먹고 6년을 버티다가도 3분 만에 해결되는 게 사랑니지만,

내 미래는 갈수록 겁이 나더라도 그건 3분 만에 해결될 리가 없다.




마취가 풀리고 상처가 아물면


마취는 발치 후 2시간 뒤에 풀렸고, 그때도 아프지 않았다.

피도 다 멎은 거 같아서 거즈를 뺐는데 빼자마자 피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흘러나왔다.

비릿한 피와 함께 고통이 밀려왔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서둘러 거즈를 다시 물고 진통제를 넘겼다.


이틀 뒤부터 일반식도 문제없이 먹었다.

붓기도 거의 없었다.

가끔씩 욱신거리는 것과 상처가 불편하다는 것만 빼면 별 문제는 없다.


발치 2일 차에 기다리던 회사의 채용 공고가 떴다.

나와 입안의 악마의 목표는 명확해졌다.

자소서를 쓰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왼쪽 사랑니를 뽑는다.

여전히 문제는 남았지만, 마취는 풀렸고 상처는 아물고 있다.

목표가 정해졌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정진해야지.


회사에 합격할 수 있을까? 왼쪽은 더 쉽게 뽑을 수 있을까?

붙더라도 내 길이 맞을까? 빼고 난 뒤에 상처가 잘 아물까?

어찌 되더라도 또다시 6년간 겁먹고 미룰 수는 없는 법.

염증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내 미래던 사랑니던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가자! 어디로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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