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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모르다 :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다.

나의 심신을 위로해 줄 '휘핑크림 얹은 아이스 민트 초콜릿'을 찾아 카페에 갔을 때였다. 불금 저녁시간의 카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잘 들릴만큼 조용했다. 주식과 코인에 대해 신나게 견해를 주고받던 젊은 남성 무리가 술집을 향해 길을 나섰고, 아이들의 학업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중년의 여성 둘도 가족의 저녁시간을 위해 서둘러 떠났다. 카페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민트 초코를 홀짝이는 나와, 태블릿 PC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올려두고 조용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한 남성만이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앳된 학생 하나가 남성에게 다가와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듣자 하니 카페에서 공부를 봐주는 과외 선생님과 그의 학생이었다. 아, 나도 학창 시절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봤더라면- 과 같은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관심을 거두려는데, 학생이 던지는 질문이 돌아서려는 내 두 귀를 붙잡았다.


"선생님, 관념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오.. 쉽지 않은 질문이다. 국어과목 과외였는데 아마 해설서에서 '이 시에는 관념적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라는 말을 보고 묻는 듯했다. 관념적이란 말을 어떻게 설명해주려나, 나도 괜히 선생님의 답변이 기다려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선생님은 자신 있게 입을 떼었다.


"관념적? 음.. 너 통념이라는 말 아니? 사회 통념이라는 말 같은 거. 그래, 통상적으로 그렇다는 거 있잖아. 그.. 통한다 할 때 통! 그렇지! 어... 관념적이라는 건 그런 비슷한 뜻인데, 음 약간 전체적으로 좀......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흠....... 아무튼 그게 어디에 나와?"



아? 관념이 통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나 싶어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검색해보았다.

관념적 ; 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
관념 ; 1. 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


아무래도 선생님은 관념적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하긴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엔 쉽지 않은 단어일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통념과 관념을 비슷하다고 하기엔 너무 애매한 풀이인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학생이 다시 질문했다.


"쌤, 그리고 공리주의는 무슨 뜻이에요?"

"공리주의? 아.... 그 공리주의는.... 그 공적인...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적당한 예시가 떠오르지를 않네....."


머릿속에 마치 자판기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지나갈 때쯤, 선생님은 이번에도 꽤나 당황한 듯 침묵을 지켰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오늘 준비해온 시간은 이런 단어를 해석하는 전개는 아닌 것 같았다. '음'과 '어'를 반복하던 선생님은 결국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아이패드를 들며 이야기했다.


"음... 이게 너한테 설명해주기엔 복잡한 용어라, 내가 너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적당한 예시를 찾아본 다음에 알려줄게. 잠시만! 일단 오늘 하기로 한 부분 먼저 펴볼래?"


선생님은 관념적과 공리주의에 대한 설명은 뒤로한 채 본인이 준비해 온 사설시조 '창 내고자'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주 잘 준비되고 정리된 멋진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선생님은 관념적과 공리주의에 대한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까. 아니면 알지만 설명할 능력까지 미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자주 '모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한다. 꼭 낯선 단어나 개념뿐 아니라 일상 속 타인의 감정의 선을 읽어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모른다고 잠시 대화를 멈추기보다는 알고 있는 듯, 같은 감정의 선을 이어가는 듯 반응한다. 뭔가를 모르는 것이 부끄럽거나, 자신을 깎아내린다는 생각이 들거나, 알 필요 없다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구태여 길게 말하고 싶지 않거나, 별 생각이 들지 않아 넘어가는지도 모른다.


감정에 관해서는 '당신의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라며 공감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될 바엔 그냥 알겠다고 하는 편이 관계를 망치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세상에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을 못나게 보는 사람보다, 오히려 멋지다고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다. 되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잃는다. 사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때가 곧 성장의 시작점이다. 인간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힘'인 메타인지가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인지할 때 비로소 무언가를 알고자 하고, 알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욱 발전한다는 많은 연구 결과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다.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더 깊은 마음까지 꺼내어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도 함께 깊어져 간다.


그렇기에 모른다고 고백하는 일만큼 멋진 변화가 시작되는 말도 없다.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한 준비이며, 시작할 용기다. 서로를 이해하며 대화할 힘이다.


그러니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전문가라는 이유로, 이제 막 좋은 관계가 시작된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말을 망설이지 않길 바란다.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고백하고, 알아가고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그리고 모른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좀 더 너그럽고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 있길 바란다.

멋진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주고 더 높은 신뢰와 지지를 보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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