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머리 없다. '인정'의 유래 / 역사의 쓸모 - 최태성
우리는 ‘인정머리 없다. 라든가 아니면'인정이 많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쓰이는 ‘인정’이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고 계신가요?
조선 후기 ‘김육’의 이야기입니다. 김육은 대동법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함부로 붙이는 게 아닙니다. 김육은 대동법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알고 나면 끄덕끄덕 할 겁니다.
저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걸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
이렇게 말할 만한 무언가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실 숨이 턱 막힙니다. 인생을 건다는 의미. 이런 질문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우실 겁니다. 김육은 인생을 대동법에 걸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던 조선 초유의 국난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그의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 복구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파탄이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라 생각했다. 10여 년간 농사꾼으로 살았던 김육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최고의 적임 자였다.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상평통보의 주조, 마차 및 수차의 제조와 보급, 새로운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의 사용 등 혁신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 가운데서도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 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 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네이버---
당시 조선의 세금은 전세, 역, 공납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전세란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내는 것으로 지금의 소득세입니다.
다음은 역인데, 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궁궐 지을 때, 길 내느라 동원될 때, 그리고 군대 갈 때 등 자신의 노동력을 세금으로 내는 겁니다.
지금의 국방의 의무가 역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납이 있었습니다. 이 공납이 문제입니다. 공납은 지역 특산품을 바치는 일입니다.
특산물 중 좋은 걸 골라서 세금으로 바치는데 서민들이 많은 고욕을 치렀습니다.
책에는 제주의 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귤은 아주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생산량도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을 테고 게다가 먼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과일이었으니 얼마나 귀하게 다루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귤을 공납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각자 배정된 할당량을 채워야 했습니다.
귤 공납은 귤이 열릴 때 개수를 세어놓고 수확할 때 얼마를 바쳐라 이런 식이었습니다. 중간에 귤이 떨어지는 것 또는 썩는 것 등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자신이 키우던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버렸습니다. 차라리 남몰래 나무를 죽여버리는 방법을 택한 겁니다.
책에 나오는 세금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볼까요. 세금 때문에 힘든 사람들 중간에 공납 대행업자가 생깁니다.
돈을 받고 공납을 대신해 주는 업체지요. ‘방납 업자’ 막을 방자 ‘방납 업자’라 불렀답니다.
이 방납 업자는 사또와 결탁하고 사또는 업자에게만 공납을 받습니다. 방납 업자는 귤 1 상자를 10배 정도 되는 돈을 받는 식으로 횡포를 부립니다. 화가 난 백성이 업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사또에게 귤을 바치겠다고 해도 사또는 백성에게 직접 받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업자에게 돈을 주고, 업자는 사또에게 사례비를 주는 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이런 사례비를 부르는 말이 ‘인정’이었답니다. ‘너 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냐.’가 그때 생긴 말이라는 거지요. 지금은 약간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만. 백성들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는 세금이었고 부패의 온상이 됐지요.
그래서 이런 폐단을 없애고자 김육은 <대동법>을 제안합니다. 그냥 쌀로 세금을 내자. 땅을 가진 사람에게 토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부자증세, 서민감세’의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넓은 땅을 가진 양반은 세금을 더 내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부자들이 세금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게다가 토지 소유자들은 당시의 최고 기득권 세력이었는데 반발이 전혀 없겠습니까?
지금처럼 양반들은 온갖 저명한 학자와 미디어를 동원해서 여론을 형성하고 부당함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가 너무 심해지자 그 대동법을 광해군이 마지못해 경기도에 우선 시행합니다.
그 후 100년 지나서야 전국으로 확대가 되었습니다만. 김육은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일생을 바칩니다.
광해군 시절 김육은 ‘청종사오현소’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학자를 문묘에 모시자는 상소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그 후 영창대군 살해되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귀농합니다. 10년 후 인조반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10년 동안 농부로 지냅니다.
그 후 그는 과거시험을 다시 치르고 장원급제해서 중앙의 정치무대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 김육은 경기의 대동법을 확대하자고 건의했으나 또다시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새로 즉위하자 70세 김육은 사직의 배수진을 치고 다시 대동법을 다시 주장합니다. 이 정도라면 정말 끈질긴 노력 하나는 알아줘야 할 것입니다.
호서 대동법 실시되고 난 후 그의 나이 79세에 대동법을 전라도까지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후 사망합니다.
그의 인생은 대동법 실시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그의 절대적 신념이 세상을 바꾼 겁니다.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걸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만한
무언가가 있습니까?
역사의 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