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복종 사이 그 어딘가
얼마 전 만난 나의 친구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그게 문제야. 너는 도통 그럴 것 같지 않은 애가 말을 너무 잘 들어."
네 살 때부터 나를 보아온 친구. 나만큼이나 나의 어린시절과 자라온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친구.
언젠가부터 살면서 순간순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이 늘 한숨을 쉬며 했던 말, "뭐 하나 고분고분한 적이 없구나 너는."
맞다. 부모님과 치뤄온 전쟁의 역사를 되짚어봐도
나는 악다구니를 쓰며 대드는 딸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부모님 뜻대로 살아야 했다는 억울함을 놓을 수 없는걸까.
나 또한 어렴풋이 느껴왔던 부분을 그 친구가 입 밖으로 꺼내어주자,
나는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나는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뭐 하나 순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주장은 제법 셌고, 그래서 말대답을 한다는 꾸지람을 넘어,
자주 혼찌검이 나기도 하는 아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순종적인'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골치 아팠겠으나,
나는 그래본들, 결국은 늘 부모님 말씀을 따르고 살았기에 억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차이의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나의 주장은 언제나 여지없이 꺾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꺾여버린 나의 뜻은 더 이상 기운을 못 차리고
뒤늦은 '순종적인 딸' 이 되어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늘 과정에서 힘들었고, 나는 결과에서 버거웠다.
어릴적부터 순하게 부모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는 분명, '순종적인' 성향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결국 고분고분해진 나의 모습과, 그로 인한 여파들은 늘 나를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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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구열이 높은 동네답게,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성문기초영문법을 옆구리에 끼고
학원을 다니기도, 과외를 받기도 했지만
나는 사실 영어의 8형식부터 수동태, 과거분사 등등등
당췌 머릿 속이 어지러울 뿐, 전혀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외우라는 단어는 꼬박꼬박 외웠고 발음은 후지지 않았어서 그런지
영어 담당이시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꽤나 예뻐해주셨다.
그래본들 그 당시 우리학교에는 유독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많아서
우리 반을 제외하고는, 한 반에 한두명쯤은 외국생활을 해 봤던 유창한 리터니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 앞에서는 아무리 혀를 굴려봤자
쭈굴이 콩글리쉬 발음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1학기 방학식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엄마는
아주 기쁜 표정과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2학기 영어말하기대회에 너가 반대표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전화가 오셨어.
네 발음이 외국 살다 온 애들 못지않게 유창하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시더라."
엄마는 기뻤지만, 나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우리 반에 하필,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럴 뿐,
다른 반에는 분명 리터니 친구들이 반대표로 나올 것이 뻔했다.
굳이 그 자리에 나가서 구색만 맞춰주고 내려오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반대표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나가, 들러리만 되고 내려오게 되면
반 아이들에게 괜한 미안함이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나 안 해. 다른 반에는 한국말만큼 영어가 편한 애들이 수두룩이야.
거기 나가봤자 창피만 당하고 말걸."
엄마는 왜 나의 말을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았을까.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만큼, 선생님의 말에도 순종하라고 가르쳤던 엄마였기에
내가 담임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에 화가 났던걸까.
아니면, 나에 대한 믿음이 과도하게 커서
내가 몇 년씩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보다도 영어를 더 잘 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졌던걸까.
그도 아니라면,
부모님이 늘 지적하듯, 그 때에도 나의 말투와 태도가 문제였던걸까.
엄마와 나는 실갱이를 시작했고, 기억에 남을만큼 호되게 혼났다.
엄마는 정말 화가 났을 때에 집어드는 구두주걱을 들고 뛰어오셨고,
나는 눈물콧물과 함께 악을 써가며 반항을 했으나
나는 곧 훌쩍이며 영어 스크립트를 쓰고 있었다.
주제와 내용도 엄마가 정해준대로였다. 그에 대해선 불만이 없었다. 차라리
의욕없는 준비를 엄마가 이끌어가 주니 편하기까지 했다.
나는 여름 내내 뜨거운 날씨보다도 들끓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대회에 나가는 것을 왜 당사자인 나를 빼놓고 엄마와 담임선생님이 결정 했는지,
내가 나가지 않겠다는 이유가 왜 엄마에게는 타당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그토록 하기 싫은 대회준비를 해주고 있는데도
엄마는 고마워하기는 커녕, 열심이지 않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인지.
엄마는 그런 나의 속을 알 리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앞에서 스피치 연습을 시켰고,
십중팔구는 빠꾸를 놓았다.
엄마 앞에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나의 태도가 엄마는 불만이었고,
만족이라고는 없는 엄마의 욕심에 나는 화를 삭이느라 힘이 들었다.
수시로 치받아 올라오는 짜증과
전교생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상상으로 힘들었던 방학이 끝나고,
나는 영어말하기대회에서 보기좋게 떨어졌다.
내용을 까먹어 뒤죽박죽이 되어 마무리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꽤나 무대체질이었던 나였지만, 준비부터 주눅이 들어있던 나는
내 앞 순서의 유창한 아이들로 더더욱 초라한 마음이 되어 있었고
내용이 머릿 속에서 뒤섞일 때마다, 문장이 자꾸 멈춰설 때마다
한숨섞인 담임 선생님의 표정은 나의 입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 때의 그 기분, 그 때의 그 선생님 표정은
어른이 된 지금도 서늘한 기억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호기롭게 주장했다 꺾인 적은 허다했고
달겨들다 크게 혼난 일도 자주였는데,
나는 왜 그 일을 그토록 잊지 못하는걸까.
중학교 1학년. 생각과 마음이 제법 자라
내가 옳다라는 확신이 생기는 시기였기 때문일까.
더 어릴 적에는 나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무언지 모를 억울함만 이리저리 굴러다녔으나,
그 일은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한
제법 논리적이고,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주장해본
처음의 사건이어서일까.
아니면,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펼쳐도 어차피 내 뜻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첫 순간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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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라온 세상은 그랬다.
가족이라는 의미를 알게 된 때부터 자연스레
학교에서, TV에서, 밥상머리에서,
나같은 경우는 교회에서까지,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쳤다.
내 이름이 이정으로 정해졌듯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자식은 부모의 말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로 정해져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반발을 했다가
'자식은 부모의 말이 순종해야 하는 것' 이라는 무적의 문장 앞에 나의 뜻이 꺾이고 나면
왠지모를 분노와 억울함이 자리잡으면서도
그와 함께 '나는 나쁜 자식' 이라는 묘한 죄책감도 함께 일어
내 속은 시끄러워지곤 했었다.
사사건건 부모님과 대립하는 일은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에 들어가 더욱 심해졌다.
비슷한 환경과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을 떠나
전국팔도에서 모여든 대학 친구들의 생활은 신세계였다.
그들에게 비교하면 나는 그저
온실 속의 화초같은 걸음마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갑 속 들어앉은 주민등록증은
더이상 부모님 뜻에, 정확히는 엄마의 뜻에 휘둘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나도 이제 엄연한 성인.
더 이상 눈물을 훔치며 방학내내 영어대회를 준비하던 중학생이 아니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호기로운 마음과 부모님의 신념은 순하게 어우러진 적 없었으므로
나의 대학생활은 전쟁터였다.
통금시간으로 매일 밤 집안은 시끄러웠고
고삐풀린 듯 밖으로 나도는 딸 때문에 엄마아빠는 한숨이 늘어갔다.
물론 나 또한
한번도 성공시키지 못한 반란에 인상을 구기며 지내는 일들이 허다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하는 사회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내 뜻을 주장하다 꺾이는, 당췌 고분고분한 적 없던 딸.
동시에, 결국 부모님 말씀과 달리 살아본 적 없는 딸이라는
애매한 경계에서 살아갔다.
어릴적부터 배워온 신념이라는 것은 무섭도록 강한 힘이어서
나는 완벽한 독립을 한 후에도 여전히 부모님이 가르쳐온 것에 크게 벗어나며 살지는 못했다.
물론, 부모님은 전처럼 나에게 강하게 뜻을 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속시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혹은 나이가 훌쩍 드신 부모님을 속상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왠만하면 맞추어 가고 있었다. 물론, 순하지는 않게. 꼭 한 번 불끈하는 과정을 가질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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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이들은 순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초등학교때 수학을 오래 가르쳐주신 원장님이
"둘 다 보통 고집이 아니잖아요." 라고 하셨을 때에,
"어머 원장님. 그런가요? 전 영이는 고집 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라고 반문할만큼, 첫째는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받아들여주는 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그 옛날 나처럼
억울한 마음으로 내 말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말귀를 알아듣는 순간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오래 설명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아이가 마트에서 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부리거나,
이를 닦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런 매 순간마다
나는 아이를 앉혀놓고 아주 긴 공을 들여 설명을 해주었다.
결국 나의 이야기를 듣고 끄덕끄덕하며 순순히 말을 들어주는 첫째를 보며,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하였다.
"네 얘기에 질려서 포기하는 걸수도 있어."
하지만 어릴적부터 '자식은 부모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을 따라야 했던 내 마음은
꽤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자식된 도리보다는
아이가 이 상황을 이해하고 따라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을 하다보면 나 또한 보다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기에
나는 첫째와 제법 잘 지내왔다.
둘째는 조금 달랐다.
둘째는 첫째와 달리,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아이었다.
아무리 내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해도
"하고 싶어!" 라는 감정 앞에서는
그 어떤 설명도 통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다.
감정이 앞선 둘째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내 설득은 갈 곳을 잃고 차곡차곡 화로 쌓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둘째 또한, 첫째보다 공을 더 들이면 결국 잘 받아들여지곤 했다.
무엇보다 떼를 부리다가도 어느 순간, 엄마 말이 틀림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지면
아주 쿨하게 돌아설 줄도 아는 아이었다.
그런 이유로 둘째는 다소 고집이 세다고 느끼며 키웠으나,
첫째가 고집이 세다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아이라는 원장님의 말씀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는 없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첫째에게 조근조근 설명을 해주었던 방법이
다행스레 잘 맞아떨어졌던 것일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둘째 또한 힘은 더 들어도
이만하면 순순히 잘 자라고 있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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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엄마가 살았던 세상과 다른 곳에서 살았던 사람.
우리 아이들은 또 다른 곳에서 살고 있으니,
나는 엄마와 달리
내가 살아온 곳이 아닌, 아이들의 세상에 마음을 맞추고 키워보겠노라던 결심.
나보다 더 충만한 마음으로 자라게 해주겠다는 다짐.
고집 센 아이들이라 해도, 내 노력으로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여기던 시기는 어느덧 지나고
아이들은 키가 크는만큼 주장도 커져갔다.
엄마가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첫째가 사춘기를 맞이하며
나의 결심과 다짐은 수시로 무너져야 했고,
방향을 잃은 채 나의 마음은 나풀나풀 흔들려댔다.
나의 엄마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 어딘가를 헤매는 엄마였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제법 자신만만했던 나의 육아관은 알고보니
굳건한 뿌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엄마로서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지쳐갔다. 그리고
십여년을 참고 삼켰던 '순종' 이라는 단어가
기어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배운대로, 자란대로,
한 번 튀어나오기 시작한 '순종' 이라는 요구는
시도때도 없이 꺼내어졌다.
그 단어는 역시나 마법의 단어였다.
이토록 쉬운 논리가 없었다.
내지르면 질 리 없는 무기였다.
사춘기 특유의 이상한 논리를 앞세우는 영이에 이어,
종종 말이 안 통하는 어거지를 부리는 신이까지.
굳이 애써 다독이고 설명하고 기다려줄 필요 없이
"자식이 되서 부모 말에 순종하는건 당연한거야." 라는 결론.
영이는 점점 멀어지고, 신이는 조금씩 불만스런 표정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영이의 한 마디에 덜컹 가슴이 내려 앉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