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김치찌개
선거가 끝났다.
우리 부부의 비상시국도 마무리 되었다.
정치얘기는 우리 사이에 금기주제이기에
선거홍보우편물을 펼쳐놓고 같이 읽을 때에도,
함께 투표소로 타박타박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어쩌다 어느 후보에 대한 생각이 튀어나오더라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상대 의견에 대한 노골적인 평은 금물이다.
결혼준비로 한참 바빴을 시기였다.
무엇을 고르러 오전내내 바빴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둘 다 즐겨가던 백반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러 들어간 참이었다.
그리고 사단이 났다. TV에 나오던 정치뉴스가 문제였다.
다름은 알고는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부딪혀본 적은 없었던,
서로의 정치성향이 반찬으로 상에 오르게 되어버린 그 날.
세상에... 이토록 벽창호 같은 남자였다니.
나의 말에 대한 그 사람의 항변이 이어질수록, 예비신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다른건 몰라도 인생관, 종교관, 정치관은 같아야 살 수 있다던 엄마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랑 가치관이 너무 다르잖아! 이토록 편협한 사람이었다니! 이 싸움을 사는내내 해야한단 말이야???
나만 그랬을까. 분명 남편도 똑같았을테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이 여자랑 살아야 한다고???
정치논쟁은 답이 없다.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 맛나는 김치찌개를, 갓 구운 고소한 고등어를 치워두고
한 상 가득 결론 없는 싸움만 늘어놓은채
싸우다가 실망하다 화를내다 꼬셔보다를 반복하던 우리는
마음이 너덜해진 후에야 서로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결혼을 해도. 정치 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
부부란 한마음 한뜻이어야 한다는 정설定說은 기어이 결혼식 주례사에도 등장을 했지만
우리는 일찌감치 다른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치만큼은 더 이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던 약속은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잘 지켜지는 중이다.
중간중간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들도 제법 있었던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정치대화는 5분을 넘기지 않는다.
길어지면 다르다는 걸 또다시 확인하게 될까봐, 깊어지면 싸움이 될까봐 조심하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남편과 나와의 다름은
정치뿐만이 아니었다.
ISTP인 남편과, ENFJ인 나는 당췌 겹치는데가 없었다. (다행일까. 나 또한 이제는 I로 돌아섰다.)
진하고 얼큰한 음식을 좋아하는 나와, 담백하고 시원한 맛을 좋아하는 남편.
밤늦도록 뭉개기 좋아하는 나와, 밤11시만 되면 취침을 해야하는 남편.
맥주 한 잔에 영혼을 싣는 나와, 술자리라면 도망가기 바쁜 남편.
뭐 하나 맞지 않는 우리가
결혼 전, 십년 가까운 시간동안 가장 가까운 선후배이자, 동료이자, 남사친여사친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뿐 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미스테리하고 놀라운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리 안 맞는 이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한 배를 타고 있다니.
김치찌개.
우리의 평행선을 여실히 보여줬던 그 날, 그 상 위의 메뉴.
김치찌개를 끓일 때마다 나는 종종 그 날의 가열차던 논쟁을 떠올리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치찌개 하나에도 우리의 다름은 녹아있다.
멸치, 참치, 돼지고기 등등 각종 김치찌개를 모두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오로지 돼지고기만을 외치는 그의 덕에
우리 아이들은 다른종류의 김치찌개를 먹어본 적조차 없다.
신혼 때, 남편의 돼지고기 취향을 무시하고 참치를 넣고 끓였다가
조용히 찌개에 손도 대지 않는 것으로 본인의 주장을 외치는 남편을 보고는
돼지고기 이외의 김치찌개는 포기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재료만 다르랴.
김치와 돼지고기를 넣고 먼저 볶아서 뭉근하게 끓여내는 것을 선호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의 취향은 볶지 않고 시원하게 끓여내는 것인지라,
그래, 이 또한 양보했다. 이 정도쯤은 맞춰줄 수 있다.
대신, 요리법을 내어주고 난 돼지고기 종류를 취했다.
지방과 껍질이 두둑히 붙은 앞다리살을 넣어서 끓여야 제 맛이라며
남편이 내게 싸인을 보낸 것이 여러번이지만,
나는 너무 많은 지방은 싫어서 꾸준히 목살을 넣고 끓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만큼 싸인을 보냈는데도 김치찌개의 고기 부위가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남편도 받아들인듯 하다.
"나는 지방이 잔뜩 붙은 앞다리살도 맛있더라?" 며 슬쩍 눈치를 살피는 일이 오래된걸 보면.
결혼하고 20년이 가까워지는 동안 우리는
아주 다른 두 성향을 평화롭게 공존시키는 법을 배웠다.
이만큼 얘기했는데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내가 접어야겠구나.
이렇게 시도했는데 고집을 피우는 걸 보면, 이만큼은 내가 물러서줘야겠구나. 하며
팽팽한 서로의 주장을 숨겨둔채, 눈치껏 조율해보는 비무장지대를 형성해 두었다.
사실, 나도 바뀌지 못하면서 남편에게 바꾸라고 종용하는건
무리이지 않나 생각한다. 나도 내 자신이 싫을 때가 많은데
저 사람이라고 나랑 살면서 참아내는게 없으랴 싶다.
서로 정도만 지키고 살아준다면 사실,
부글대는 이유들은 이삼일만 지나도 까먹을 일이 대부분이었다.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일치시키지 못한채, 평행선을 그리며 살고 있다.
비록 반듯하고 똑 떨어지게 예쁜 평행선은 아니더라도
내가 팩 하는 마음에 저만치로 빗겨가면, 어느새 남편은 스리슬쩍 내 쪽으로 한 걸음 옮겨오고
남편이 제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면, 나는 끙 한 번 한숨 쉬고 그 쪽으로 방향을 틀어주며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평행선을 그려나간다.
아마도 별 탈 없이 꽤 긴 시간을 건너온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반듯하지 못한,
구불구불한 평행선이어서일 것이다.
그래도,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설겆이를 잘 하는 남편이어서
식탁은 풍성하지만 부엌은 깨끗할 수 있다.
여행 계획 세우는 것을 잘 하는 나와, 길찾기를 잘 하는 남편인지라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에 허둥댈 일은 드물다.
건강불감증 나와, 건강염려증 남편이기에
적당한 밸런스를 맞춰가며 서로와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다.
사람들은(특히 우리 엄마) 부부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은 옳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평행선 관계라는 것은
꽤나 유연하고 효율적인 일상을 유지해주는 요령이 되어주는 중이다.
아이들이 크고나니, 종종 우리가족의 대화에는 정치 이야기가 훅 들어온다. 선거철이 되면 더더욱 그렇다.
엄마는 누구를 뽑을거야? 아빠는 그 사람이 괜찮다고 생각해?
아이들의 예고없는 질문은 우리 둘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든다. 분명히 남편도
그 날의 김치찌개 백반집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비상이야! 피해! 속으로 외치고 있을 것이다.
누구하나 급커브를 돌게 되기 전에 남편도 적당한 대답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
적당한 거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으려는 노력만큼은 나와 동일한 듯 하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남편이 한번 내가 한번 눈치껏 양보해가며
그래도 뻗으면 손 잡을 수 있는 거리 정도로 평행하게 살아갈 듯 하다.
아이들의 질문에 둘 다 입을 모아 떠들어댈 수 있으면 신이야 나겠지만,
서로 조심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가랑비 젖듯 부모의 신념에 녹아드는 일 없이
자신들만의 선택을 하게 되는 장점이 생기지 않을까 위로해보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의 평행선도 부부로 살아가는데 제법 괜찮다.
사실, 한 배를 탔다는 것도
멀리서 보면 하나이지만
배 안의 둘은
오른쪽 왼쪽, 반대쪽을 젓고 있는 평행선이지 않은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감사한 일이다.
남편!
앞으로도
분신인양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아쉬워 맙시다.
한 쪽의 사소한 진동까지 함께 흔들리고
다른 쪽의 멈칫거림에 같이 얼음이 되지 않도록
그저 사이좋은 평행선으로
천천히 구불대며 살아갑시다.
그런 의미에서
김치찌개 돼지고기는 앞으로 목살 대신,
껍질도 지방도 넉넉한
오겹살까지는 양보해보겠어요.
돼지고기 김치찌개
사실, 김치찌개는 김치의 맛으로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잘 익은 묵은지로 푸욱 끓여내는 것이 가장 좋지만, 간혹 묵은지가 없을 때에는 적당한 익은 김치를 넣는 대신 식초를 넣고 끓여주면 시큼하고 맛있는 김치찌개를 완성할 수 있어요. 그리고 모든 찌개의 킥, 뭉근한 불로 오래 끓여내기, 하나 더하자면 하루쯤 냉장고에 넣어두기까지 마무리하면 진한 국물의 김치찌개를 만나실 수 있을거에요.
1. 묵은지와 김치국물을 넉넉히 넣고, 적당한 양의 물을 부어줍니다. 동시에 돼지고기(저는 목살, 남편은 지방이 두툼한 앞다리살. 오늘은 서로를 조율한 오겹살입니다.)를 넣은 상태로 끓여줍니다.
2. 찌개가 끓어오르면, 충분한 파와 다진 마늘, 다진 생강(혹은 생강가루), 고춧가루를 넣고 푸욱 끓여냅니다. (두부를 넣어도 좋지만, 저희 식구들은 오리지널한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생략했어요.)
3. 국간장과 후추로 마지막 간을 조절해주세요. (저희 식구들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설탕은 생략합니다. 배추와 파만으로도 충분히 단 맛이 올라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