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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도가네 엄마

호래기회

by 이정

다소 징그러운 이야기일 수 있으니

비위가 좋지 않으신 분들은 유의 바랍니다




생물 호래기를 가까운 이웃이 선물해주었다.

우리집 아이들이 워낙 회나 숙회를 좋아하는 걸 아는지라

먹어보니 너무 싱싱하고 맛있었다며

제법 많은 양을 보내주었다.


한치회나 산낙지도 잘 먹는 아이들이라

호래기회를 초장에 푹 찍어 먹어댈 모습을 상상하니

받기 전부터 마음이 설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고는 심난해졌다. 아... 호래기가

생각보다 너무 귀엽다.


그 조그만 몸에 눈이 어찌나 똥그랗고 큰지

아이들은 젓가락을 갖다대기도 전에

꼴뚜기 왕자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호래기와 눈으로 대화를 시작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부터가 이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바닷 속 삶이 들려오는 것 같고

이 곳에 올 때까지의 서글픔이 느껴지는데

아이들은 결코 먹지 못할 것이다. 맘 약한 둘째는 울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여자치고 겁이 많지 않아서

개구리도 잘 잡고, 메뚜기도 잘 잡고,

동물원에서 뱀을 목에 두르는 것도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었다.

다만 내가 유달리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죽어있는 동물, 혹은 죽어가는 생물이었다.

죽어있는 것을 보노라면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죽어가는 것을 보다보면 지금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자꾸만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면 급기야

이것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고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이렇다보니 요리를 시작하고 나서

생선손질은 내게 엄청난 시련이었다.

손질되어 토막난 '음식 모양' 의 것들은 나의 이러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으나

눈이 마주치거나, 생전(?)의 모양을 맞닥뜨리면

칼을 들고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살인범이라도 되어

이 아이를, 이 아이의 가족들을 절망 속에 빠뜨리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거듭에 거듭을 도전하여

죽어있는 생선은 뚝딱뚝딱 손질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아이들이 열광하는 게장에도 도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움직임은 죽은 생선의 모양새와는 차원이 달랐다.

살아있는 꽃게에게, 그것의 생명에 치명적일 수돗물을 들이부으며

몸통을 닦아내고 다리를 손질하는 일은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대며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막상 구석구석까지 훑어먹는 아이들을 보면

그 과정을 어느새 잊고 다시 꽃게를 사다가

악을 쓰며 게장을 담그는 엄마가 되어 있었덛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 그 시를,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을 읽은 순간부터

나는 게장 담그기를 멈추었다. 도저히 다시 게장을 담글 수 없어졌다. 나는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 시를 이 곳에 옮겨놓을까도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도 맛있는 게장을 담글 분들을 위하여)

간장게장은 의외로

활게보다 급냉해서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

이렇게 우리집의 제철 게장 담그기는

꽤 오랫동안 멈추어졌었다.

이제는 버둥대는 게들을 냉동실에 휙 넣어두고

모른척 하다가 담그면 되었다. 움직임은 피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한때는 그런 여자였다.

집 안으로 날아든 벌레를 죽이지 못해 겨우겨우 창 밖으로 날려보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개천에서 잡아온 올챙이가 하루이틀만에 죽으면

수조가 있는 방문을 폐쇄하고, 남편이 퇴근하여 처리해줄 때까지 근처도 가지 못하던 여자였다.

그런데

생선 한 마리도 버겁고, 꽃게 몇 마리에 울었던 내 눈 앞에

해맑은 눈을 지닌 호래기 수십마리가 누워있다. 나는 저 눈을 해결해야 할 판이다.


이 나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

변해야 했던 것이 비단 이것뿐일까.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코로나를 겪으며,

큼직한 변화들마다 나의 차림새는 푹푹 꺾였다.

아이들은 믿지 않겠으나 이래뵈도

집 앞 심부름을 나갈 때에도 마스카라는 발라야 하는 여자였다.

어쩌다 운동화를 신으면 뒤로 넘어가는듯 느낄만큼

뒤꿈치를 잔뜩 올려놓는 하이힐을 절대 포기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 후줄근해서 더는 조심하지 않아도 될 옷을 입고,

대충 스킨로션만 바른 얼굴로 집 안에서 하루를 보내기 십상인 나를

남편은 잔뜩 낯설어한 적도 있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나를 잘 알고 지내던 그에게는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변화도 없었겠으나,

이제는 되려 화장을 하고 잘 갖추어 입는 날을

당황스러워 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외모뿐이겠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의 외출만 하는 나도 한때는

하루라도 약속이 없으면 큰 일 나는줄 알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안 나가면 누가 잡아간다니!" 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던 날들이 있었다.

대학시절 다이어리를 펴보면

어떻게 이리 살았는지, 하루에 약속이 두세개 연달아 잡혀있고

사방팔방 안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이

어떻게 그 힐을 신고 하루종일을 돌아다녔나 싶어 입이 벌어진다.

안그래도 엊그제,

외출 좀 하자는 남편 말에

"어릴 때 너무 쏘다닌데다, 아이들 데리고 평생 돌아다닐 양을 다 써버려서 그래." 라고 대답한 참이었다. 이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글픈 맘보다는

엄마의 위치로 진화한듯 하여

나 자신을 기특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와 집 앞을 나갈 때마다 한시간 이상 꽃단장을 해야 했다면

약속과 일정이 넘쳐나서 온 사방을 놀러다녀야 하루가 뿌듯했다면

혹은

아이들 입에 들어가야 할 요리재료 앞에서 넋 놓고 눈물을 질금댔다면

나는 아이들을 지금처럼 키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못 되기에

그렇다면 이 쪽 변화가 여러모로 최선의 방향이었구나 생각한다.


20대에는 신나게 놀았다. 나쁜 짓 빼고는 뭐든 온 힘을 다해 경험하고 신나게 즐겼다.

30대가 되고서는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고, 40대가 되어서는 열심히 엄마의 자리에 적응했다.

나의 이러한 시절들이 고맙다. 그 때 공부를 더 했더라면, 그 때 시간을 덜 허비했더라면, 이라고 후회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겠으나

내가 그 시절 하고팠던 것들을 원없이 해본 시간들이 있어서 그나마

덜 아쉽고 덜 억울한 맘으로 지금의 나를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자.

지금의 나는 이제

호래기를 마주해야할 시간이다.

날 바라보는 눈빛의 호래기들 앞에

비장한 각오로 가위를 들고 섰다.

서두르자. 둘째가 곧 집에 올 시간이다.

엄마는 너희 몰래 몬도가네.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남모르는 가위질을 해주마.


험한 일은 엄마에게 맡기고 너희들은

고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으며,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라렴.


이거... 꼭... 다 먹어야 해... 꼭이야...





호래기회


회이니마큼 이렇다할 레서피가 있을까요.

싱싱한 호래기를 깨끗이 씻은 후에

초장이나 참기름장에 콕 찍어먹으면 된답니다.

저희 아이들은 초장을 좋아해서

와사비 살짝 섞은 초장을 찍어

마늘과 고추를 곁들여 깻잎에 싸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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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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