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핀셋 노태우와 오함마 김영삼

by 변우현의 인물당

#3 핀셋 vs 오함마

1991년 10월 25일, 사인이 담긴 각서 사본이 폭로됐다.


김영삼은 며칠간 침묵하다 역공을 시전한다.

해명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내각제 주장 자체를 '정치 공작'으로 규정해 버린다.


여론이 술렁였다.

김영삼이 대선 후보 되긴 틀렸다는 비관적 전망이 돌았다.


민주계의 집단 탈당 움직임이 일자,

김영삼은 "연말까지 후보 가시화가 안 되면 내가 앞장서서 나가버리겠다"며 사태를 무마한다.


노태우는 김윤환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김윤환은 김영삼의 파괴력을 실감했다.

김윤환은 "김대중을 이길 유일한 사람"이라며 김영삼 지지를 결심한다.


노태우는 노재봉을 총리로, 박철언을 장관으로 복귀시키는 反김영삼 인사를 단행한다.

노태우는 김영삼에 충격 받아 진정제까지 맞았단 후문도 돌았다.


보안사 시절 정치 공작을 학습한 노태우는 '핀셋 스타일'로 정치인 길들이기를 자신했다.


저마다 자신했던 성공방정식은 언젠가 실패로 돌아온다.


김영삼은 진술축미를 지지에 깔고 앉은 제왕 사주로 술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사주의 기세로는 명나라 주원장과도 비슷하다 했다.


노태우의 ‘핀셋 스타일’은 김영삼의 '오함마 스타일'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4 책임론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으로 과반에 미달한다.


선대위원장은 김영삼이었다.

민정계에서 책임론이 터져 나왔다.


김영삼은 나흘간 칩거 후 "5월 전당대회 경선 출마"를 폭탄 선언한다.


김영삼은 1971년 대선 경선 트라우마가 있다.

경선 보단 추대를 원해왔다.


경선을 수용하는 대신 후보 조기 가시화를 요구했다.

김대중을 상대할 대중 지지 기반은 자신뿐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딜레마에 빠진 노태우는 김영삼의 요구를 수용한다.


안기부를 통한 물밑 작업이 진행됐다.

장애 요인이던 민정계 박태준마저 경선을 포기하며 교통정리는 끝났다.


체념한 박태준은 "니들 지금 각본 쓰고 하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선 후보가 된 김영삼은 당선을 향한 질주를 시작한다.

작가의 이전글김영삼: 산 넘어 산, 소련 방문과 내각제 각서 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