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낙선한다.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 패배였다.
김영삼 997만 표, 김대중 804만 표.
지지자들의 기대를 한참 벗어난 차이였다.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김대중은 ‘벙커’라 불리던 지하 서재에 칩거한다.
하의도 귀향을 검토했다.
하의도는 기자들이 찾아오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김대중의 언론 노출은 위험했다.
김영삼에겐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정주영의 현대도 작살났다.
현대 명예회장직도 내놓아야할 판국이었다.
정주영은 정몽준에게 “명예회장은 됐고 이대에서 받은 명예박사를 반납하는 건 어떠냐” 며,
반쯤 농을 칠 여유라도 있었지만 김대중은 그렇지 못했다.
김영삼 지지도는 90%로 대통령 역대 최고였다.
‘YS는 못말려’가 대유행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숫자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 박권상은 런던 특파원 경험으로 김대중에게 ‘드골 케이스’를 조언했다.
박권상은 전주고, 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관훈클럽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해낸 사람이다.
관훈클럽 초창기 멤버들은 호남 비율이 높았다.
조언 메시지는 짧고 강렬했다.
"제발 말 좀 줄여라, 언론을 피해라, 신비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리움이 생긴다."
박권상의 조언 탓인지 몰라도, 김대중은 해외 출국을 고민했다.
김대중은 미국을 원했다.
망명 경험으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도 언론 노출이 불가피했다.
결국 영국을 선택한다.
김대중은 옥스퍼드를 희망했다.
옥스퍼드는 총리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정치가 강한 대학이었다.
‘정치 땟국물을 지우자’는 취지에 맞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를 택한다.
김대중이 아니라도 정치인의 미국행은 흔했다.
정치 활동 규제에 묶인 김종필도 미국에 체류하다 돌아와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의원직 상실로 미국에 떠난 이명박도 맨하탄 고가도로 철거를 보고 청계천 복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행은 극히 드물었다.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를 졸업했지만 정치인 이전 얘기다.
영국은 익숙하고 낯선 나라였다.
김대중은 경희대 교수 라종일의 도움을 받는다.
라종일은 백봉신사상으로 유명한 백봉 라용균 전 국회부의장 아들이다.
중앙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정치학계에선 드물게 케임브리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친 라용균과 김대중은 1960년대 민주당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라종일은 케임브리지로 김대중을 안내하며 정계복귀도 건의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머문 집은 방 3개짜리로 비좁았다.
안방은 내외가, 작은 방은 박금옥 비서가, 가장 작은 방은 서재로 썼다.
박금옥 비서는 김대중 부부의 수양딸이라 불렸다.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총무비서관을 역임한다.
이후 많은 총무비서관들이 비리에 연루됐지만 박금옥은 잡음이 없었다.
원래 총무비서관은 총무수석이었다.
정말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맡겼다.
김영삼은 총무수석으로 친척이었던 홍인길을 임명했다.
한보 비리에 홍인길이 연루됐다.
한 때 깃털론이 세간의 화제였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하자마자 총무비서관으로 격하시켰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