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평생 성실했다.
세속적 기준에서 인생의 잔재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 많이 쓴다며 측근들에게도 술 마시지 말고 골프 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공부를 하라고 했다.
차량 이동 중에도 눈 감으면 토막잠을 자고,
눈 뜨면 가위로 오려뒀던 신문 기사 조각을 호주머니서 꺼내 읽고,
귀에 이어폰 꽂고선 미니카세트로 어학 공부 하던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케임브리지에서 제공한 작은 연구실에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었다.
쉴 새 없이 재기를 모색했다.
1993년 7월, 김대중은 영국 체류 6개월 만에 귀국한다.
생각보다 빠른 귀국이었다.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YS와 만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대중은 답했다.
“YS가 누굽니까? 정치를 떠난 사람에게 정치 용어로 물어보면 안 되죠.”
기본적으로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다.
돌아온 김대중의 손엔 영국에서 준비해온 To Do 리스트가 있었다.
연구실에서 세상과 담 쌓고 책만 읽은 게 아니었다.
김대중은 귀국하자마자 거처를 일산으로 옮긴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통일과 동북아 평화라는 문제의식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했다.
휴전선에 가까이, 동교동보다 북쪽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김대중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논리적 정합성에 맞추려 했다.
그래서 김영삼보다 한 템포씩 느린 면도 있었다.
지지자들의 마음을 더 사로잡기도 했지만 지지자들의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하게도 했었다.
당시 대우 창업주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베스트셀러였다.
때마침 일본통인 한양대 수학과 김용운 교수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권학론> 사례를 제안했다.
김대중에게도 "전 국민이 읽을 책을 써보라" 권했다.
강한 영감을 받은 김대중은 1993년 말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출간한다.
김영사 측은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 정치 이야기를 빼길 원했지만,
김대중은 반문했다.
“평생 정치 해온 사람이 정치 없는 인생 얘기가 가능합니까?”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그때까지 김대중이 썼던 책들 중 최다 판매량을 기록한다.
하지만 여전히 정계 은퇴를 번복할 명분이 없었다.
돌파구는 외교안보였다.
1994년 1월 아태재단이 출범했다.
때마침 북핵 사태가 터졌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김대중이 운신의 폭을 넓힐 찬스였다.
5월 김대중은 워싱턴 방문해 카터에게 방북을 권유했고,
6월 카터는 김일성을 만나 남북정상회담 약속을 받았다.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죽었다.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김일성이 죽지 않았더라면 남북정상회담과 노벨상 주인공은 김영삼이 될 뻔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버는 상황은 면했다.
“그래도 김대중이가 똑똑하긴 하다” 라는 세간의 평으로 존재감이 과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