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살아남아야 강자로 인정받는 정계 복귀

by 변우현의 인물당

#1 이기택

선거를 치루며 이기택과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기택은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4.19세대의 기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흔히들 김영삼 측근으로 아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도 정치권 데뷔는 이기택 비서관이었다.

노무현과 같은 부산상고 출신이었다.


이기택도 아쉽지만 영남은 더 아쉬웠다.

도로 김대중당, 도로 호남당이 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1992년 대선 참패로 김대중은 지역 고립의 위험성을 알았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전국 정당화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민주당계 정당에서 이어온 '동진 전략'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처럼 '호남 지지 받는 영남 후보'라는 필승 공식으로 정리된다.


때문에 이 때 김대중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2 정계 복귀

1995년 7월 마침내 정계 복귀를 선언한다.


예상대로 비난이 쏟아졌다.

전부 아니면 전무인 도박이었다.


대선에서 지면 '불치의 대통령병 환자'가 되고, 이기면 '불굴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언제나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신당 이름은 김대중이 직접 지었다.

인도 네루의 '국민회의파'에서 착안한 '새정치국민회의'였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오스만 제국 청년투르크당(Young Turks) 이름을 빌려온,

아이돌 ‘영턱스클럽(Young Turks Club)’ 만큼이나 새로운 작명 시도였다.


창당도 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튄다.

노태우 비자금이 김대중에게도 흘러갔단 의혹이었다.


이른바 '20억 플러스 알파설'이었다.


김대중은 한 달 여 침묵한다.

그리고 집 근처 서교동 성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한다.


"20억 외에 더 받은 건 없다"


김영삼은 김대중을 “숨 쉬는 거 빼곤 다 거짓말인 사람”이라 했지만,

측근들이 본 김대중은 고구마 기질이 강했다.


김대중은 세례명 토마스 모어에 영 탐탁찮아했지만 그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었다.


재밌는 점은, 민주당 신파 출신 김대중은 장면을 대부 삼아 천주교 신자가 된 반면,

민주당 구파 출신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종교마저 끝없는 평행선이었다.


#3 15대 총선

1996년 15대 총선 결과는 참담했다.


김대중은 정권심판론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심판 당한 건 김대중의 정계 복귀였다.


서울 의석은 반 토막 났다.

이종찬, 정대철, 한광옥 등 당 중진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이 때 덩달아 낙마한 노무현은 팔자에 없던 고깃집 사장으로 변신한다.

가게 이름은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를 뜻하는 ‘하로동선’.


신한국당 이회창도 결과는 만족 못했다 할 만큼 제3당 자민련만 최대 수혜자였다.


언론과 당내에서는 "차기 대선은 끝났다"는 패배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김대중은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총선 전 65석이었는데 79석이 됐으니 우리는 약진한 것이다."


김대중은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평소에도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내용을 그냥 수긍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게 있으면 그걸 최대한 활용해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이제 어떻게든 김종필과의 DJP 연합을 성사시켜내야만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김대중: 이기고도 죽을 뻔 했던 95년 지방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