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서울고와 김원규의 수처작주

by 변우현의 인물당

#1 서울중

이순재는 어릴 때 병약했다.


국민학교 운동회 날이면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졸업 전까지 운동회를 제대로 치러본 적 없다.


조모는 소풍까지 따라다니며 밥 꼭꼭 씹어라 외쳤다.

그 정성 덕분인지 중학교 이후론 큰 병이 없었다.


2차대전 말 소개령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가평으로 피해 살았다.

해방 후 아현동으로 돌아왔다.


이순재는 아현국민학교 시절 수학을 어려워했다.


배우 안성기도 바쁜 아역 생활에 학업이 소홀해져 수학을 어려워했다.

해도 해도 안 되자 동성고 3학년 때 삭발하고 수학을 통째로 암기했는데도 실패한다.


수학 때문인지 이순재 서울중 입학은 어려울 거라 봤다.

서울중이 신흥 명문으로 거듭나던 때였다.


학교 측에선 양정중이나 배재중도 권했지만 이순재는 거부했다.


하지만 인생은 운칠기삼이다.

그 해 서울중 수학 문제가 쉽게 나왔다.

이순재는 합격의 기쁨을 맛본다.

(이후 학제 개편으로 6년제 서울중은 3년제 서울중/고로 나뉜다.)


#5 김원규

이순재는 여러 인터뷰에서 서울고에 깊은 애정을 보여왔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인기로 서울고 특강도 갔다.

서울고 재학생들은 ‘야동순재’를 외치며 열광했다.


이순재는 서울고, 서울대 은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서울고 초대교장 김원규는 이순재의 가치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김원규는 공교육 슈퍼스타였다.

180cm 장신에 수려한 용모, 평양고보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젊은 시절엔 잘 생기고 미혼이란 이유로,

여학생들 학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며 경기여고보(현 경기여고)에 부임 못할 뻔 했다.


김원규는 미 군정에서 경기도 학무국장이었다.

서울중 재개교를 준비하다 아예 교장을 맡아버린다.


훗날 빅3로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구도가 짜이지만,

경기고는 경성제1고보, 경복고는 경성제2고보로 전통의 강자였다.

서울고는 후발 주자였다.


서울고 전신인 경성중은 주로 일본인 관료들의 자녀들이 다녔다.

해방으로 학교는 비었다.


재개교는 했지만 학생 모집 기간을 놓쳤다.

김원규는 월남한 이북 출신 학생들을 대거 입학시켰다.


김원규는 지각으로 담 넘던 학생들 직접 뒤쫓다 다리가 부러졌다.


특히 교사 영입에 공을 들였다.

국어 황순원 소설가, 수학 조병화 시인, 체육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 등 최고의 교사진을 갖춘다.


그 결과 서울고 1회 졸업생은 98%가 서울대 합격했다.


서울고 교훈은 남다르다.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을 지키자.’

김원규가 만든 교훈이었다.


이순재는 서울고 교훈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왔다.

노회찬 의원이 의원실 벽에 경기고 교훈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을 걸어뒀던 것과 비슷하다.


김원규 교장의 교육 지론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였다.

어디서든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지론은 이순재 배우 인생에 가장 중요한 뼈대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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