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은에 관한 모든 것은 기독교에서 시작한다.
손주은은 1961년 경남 창원에서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손주은 이름은 ‘주’님의 ‘은’혜 줄임말이다.
재건교회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재건교회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기독교 내에서 가장 격렬한 신앙투쟁을 보여줬다.
최덕지 목사는 출소 후 주로 부산 경남 지역에서 목회 활동했다.
손주은은 1968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장손이었던 손주은이 국민학교 1학년 첫 시험을 앞두자 조모는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다.
손주은 아래 동생들도 시험이 있을 때면 조모는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 손주은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주은은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손주은 집에 자주 찾아와 월반을 권했다.
2년 월반을 권유했지만 타협점으로 1년 월반을 택했다.
국민학교 1학년을 마치고 바로 3학년으로 월반하면서 국민학교를 5년 만에 졸업했다.
손주은과 이경규는 고2,3 같은 반이었다.
부산 동성고 25회 졸업 동기지만 나이는 이경규가 한 살 더 많은 이유다.
손주은은 한 살 더 많은 형들을 친구 삼아 살게 되었다.
신동이라는 주변의 기대는 부담이 됐다.
스스로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강박감이 싫었다.
손주은은 남들의 이목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부친과의 타협으로 중3 때 비평준화 지역이던 창원을 떠나 평준화 지역이던 부산으로 떠났다.
가족과 떨어져 살며 잔재미들을 알아갔다.
손주은이 입시설명회에서 몰입의 소재로 자주 언급한 14시간 연속 축구를 했던 때도 이 시절이다.
손주은은 중3 겨울방학 내내 놀다가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반 등수 13등, 전교 등수 54등을 받았다.
난생 처음 받아본 성적표였다.
속죄의 심정이었다.
담임 선생님께 성적표와 편지를 함께 집으로 부쳐달라 애원했다.
편지엔 다음 시험은 반에서 3등, 전교 20등 안에 들겠다 약속했다.
기적처럼 반에서 3등 전교 18등을 해냈다.
여세를 몰아 10월 모의고사에는 전교 1등을 해냈다.
손주은은 고2 때 여학생을 사귀다 실연을 겪는다.
실연의 아픔을 지우려 종교에 몰입했다.
부산과 마산을 오가며 교회 부흥회에서 찬양을 했고 청년부 예배를 이끌었다.
사람들의 호응이 좋았다.
손주은은 타고난 소질을 확인했다.
목회자의 길을 꿈꿨다.
부친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경남 도의원으로 정치도 했다.
부친은 손주은이 법대로 진학해 판검사가 되길 바랬다.
손주은은 부친과의 논쟁 끝에 어떻게든 목사가 되어야겠단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선택을 결과로 증명해야했다.
신앙의 힘으로 미친듯이 공부했다.
매일 독서실에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공부했다.
하숙집에 와서 2시간만 자고 다시 학교에 갔다.
토요일 자정부터 일요일까지는 ‘경건의 시간’으로 공부를 멈췄다.
토요일 자정엔 교회로 달려가 새벽 4시30분까지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일요일엔 주일 활동을 하고 월요일부터 정해진 일상으로 돌아갔다.
과도한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서울대 인문대에 떨어졌다.
재수를 시작했다.
집에서 혼자서 공부해보겠다 아등바등했지만 허송세월이었다.
뒤늦게 부산에 재수학원 등록했다.
자기 비하와 죄책감에 빠졌다.
또 다시 속죄의 시간이었다.
여름부터는 삼베옷을 입고 재수학원에 다녔다.
머리를 밀고 고무신을 신으며 스스로에게 벌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