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은: 모나미153 볼펜과 엉덩이 힘

by 변우현의 인물당

#1 과외

1984년 손주은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동갑내기로 중학교 음악교사였다.


손주은을 처음 본 아내는 탐탁찮았다.

손주은은 밤새 2m 길이의 편지를 써가며 마음을 돌렸다.


손주은이 제대하고 대학생 신분이던 1986년 7월 결혼했다.


결혼 후 손주은은 부친으로부터 생활비 80만 원을 지원받았다.

대학 입시 치르던 동생 손성은을 돌보는 조건이었다.


손성은은 연세대 전자공학과에 합격했다.

동생이 신촌에서 자취를 하자 부친의 생활비도 끊겼다.


1987년 2월 26일, 서울대 졸업식날 손주은은 커피를 팔러 나섰다.

전날 아내는 손주은에게 통장에 3만원 밖에 없다고 했다.


손주은은 동생과 동생 친구까지 불러 졸업식장에 갔다.

커피포트 10개 들고 서울대 대운동장에 갔다.


많은 커피 장사들이 LPG까지 동원해 와있었다.


장사 접어야 하나 싶은 찰나에 기동력을 살렸다.

축하객들 사이를 누비며 커피를 모두 팔았다.


손주은은 커피장사를 계기로 가장의 역할을 자각했다.


커피 판 돈 5만원으로 1인분 2000원짜리 동태찌개 4인분을 사 먹었다.

남은 돈은 아내에게 줬다.


손주은은 예전 하숙집을 찾아갔다.

과외 자리를 소개해달라 부탁했다.


1987년 3월 2일 손주은은 잠원동 한신아파트 307동으로 갔다.


고2 여학생은 의사의 딸이었다.


공부도 삶도 의욕 없는 모습이었다.

손주은은 충격받았다.


손주은은 5분만 말할 테니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말하라 했다.


공부만이 네 삶의 구원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공부 못하면 돈으로 억지 시집을 가고, 창녀의 삶만도 못하단 독설도 덧붙였다.


여학생은 솔직하게 말해줘 고맙다며 펑펑 울었다.


수업은 시작됐다.

고2였지만 중학교 내용부터 다시 했다.


때론 구타도 불사했다.


과외 두 달 만에 여학생은 반에서 10등을 했다.


가능성이 보였다.

제대로 해보자며 하루에 모나미153 볼펜 한 자루씩 써가면서 공부했다.


#2 모나미153

볼펜 한 자루엔 손주은의 색다른 체험이 있다.


1977년 가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용기를 내 편지를 썼다.

보름 만에 답장이 왔다.


그 시절 그렇듯 둘은 빵집에서 만났다.

두 달 뒤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두 달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공부가 되질 않았다.


손주은은 공부와 사랑의 접점을 찾았다.

하루에 볼펜 한 자루씩 써가며 공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60자루의 볼펜을 갖고 그녀를 만났다.

공부와 사랑이 용융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남자들이 군대 건빵 별사탕 모아주거나,

십원 짜리 동전을 갈아 반지 만드는 것보다 분명 고결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그거였다.

여자는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손주은의 실망감은 더 컸다.

결국 둘은 헤어졌다.


10여 년 전 손주은의 경우와 종합적인(?) 의미에선 달랐지만,

여학생은 4시간 30분에 볼펜 한 자루씩 써가며 쉬지 않고 공부했다.


공부의 본질은 머리와 손으로 이어진 엉덩이 힘이었다.

비약적인 성적 향상은 호출 받은 콜택시처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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