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이면 아내는 아이들과 승용차로 교회에 나갔다.
1991년 9월 15일 일요일이었다.
손주은이 차를 갖고 나갔다.
가족들은 택시를 탔다.
택시는 교각을 들이받았다.
아내는 한 달 만에 깨어났다.
한동안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은 의식을 회복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후 9개월 딸도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딸 장례식을 치르고 손주은은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소식이 알려진 강의실은 울음바다였다.
차마 사는 게 아니었다.
자살도 고민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은 강의뿐이었다.
1주일에 60시간이던 초인적 수업 일정은 구원이었다.
다시 아이들이 태어났다.
안정을 되찾아갔다.
1995년 서초동에 ‘진리와 자유’라는 학원을 열었다.
송파에는 ‘참배움터’라는 학원을 열었다.
손주은은 1990년 경인학원을 열고 5년 만에 3개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됐다.
서울대 자연대 대학원생 이범은 아는 형 소개로 알바를 가게 됐다.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원장이라길래 ‘설마’ 싶었다.
손주은이 모든 걸 가르치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그 무렵 손주은은 고3 1인당 전 과목 과외비로 200만원을 받았다.
월수입이 5000만원대였다.
1996년 고민이 생겼다.
강남 부잣집 애들 가르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걔네들 공부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건 누군가 뒤로 밀려난단 얘기였다.
1996년 12월31일, 손주은은 이천 한 호텔에서 혼자 밤을 새웠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결정하고 싶었다.
부친은 손주은에게 1988년 추석부터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 했다.
그 후로 손주은은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았다.
억울했지만 손주은은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질 못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손주은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강의와 장사였다.
‘깨끗한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1997년의 각성을 위해 ‘ROOT 97’을 만들었다.
‘Resonable(합리적으로), Organic(조직적으로), Open-minded(열린 마음으로), Together(다함께)’라는 의미였다.
이 슬로건을 자신의 학원에 걸어뒀다.
손주은의 학원 실장은 손주은의 열강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대중강사로 나설 것을 권했다.
이 실장은 손주은의 이력서를 들고 유명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외면했다.
손주은은 과외라는 비공식 경력뿐이었다.
학원가도 초식을 따졌다.
손주은은 문전박대한 학원장들한테 꼭 한마디씩 했다.
“당신들 나를 안 잡은 게 일생일대의 후회가 될 거다”라고 했다.
서울 시의원하던 친구 빽을 써 강남 대일학원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었다.
손주은이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하지만 대학 전공이 아닌 과목을 가르치는 건 불법이었다.
손주은은 ‘통합사회’를 가르치기로 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수업이었다.
일종의 크로스오버였다.
초창기 수능과 맞아떨어졌다.
전단지 10만장을 뿌렸다.
첫 달 등록생은 8명이었다.
첫 달 월급은 32만원이었다.
때마침 손주은이 운영하던 학원은 고액 과외 단속에 걸려 약식 기소됐다.
벌금형을 받았고 1년간 학원 운영을 할 수 없었다.
잔교가 불살라진 셈이었다.
손주은은 대중강의에 집중했다.
5개월 만에 100명씩 20개 강좌를 다 채웠다.
2001년 월 수강생 6750명까지 가르치게 됐다.
손사탐 레전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