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제도권 진입 실패와 실험극장의 시작

by 변우현의 인물당

#1 몰입

이순재는 몰입도가 높은 인간형이다.


앉은 채로 <햄릿>을 2번 감상했다.

다음 날 영문과 셰익스피어 강의를 청강했다.


“햄릿을 어떻게 보십니까” 교수에게 대놓고 질문했다.


원하던 수준의 답을 받지 못한 이순재는 아쉬웠다.


이순재는 로렌스 올리비에 자료들을 직접 찾기 시작했다.

국내 자료가 없다보니 일본, 미국 자료까지 뒤적였다.


우리나라는 배우가 딴따라 취급 받지만 영국은 예술로 승화했단 걸 알았다.

이순재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국도극장을 찾아가 <심야의 탈출> 감상했다.

앉은 채로 2번 감상했다.


2년 뒤 대학 4학년 때 동도극장에 오픈런했다.

앉은 채로 4번 감상했다.


<심야의 탈출> 러닝타임이 1시간47분이다.

8시간 동안 한 영화만 봤단 얘기다.


나중에 논산훈련소에서 가서도 1번 더 봐서 총 7번 감상했다.


몰입의 미학이 거장을 만들어 갔다.


#2 연극과 철학

이순재의 서울대 철학과 은사는 고건 총리의 부친 고형곤 교수였다.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순재는 전공에 만족했으나 전공 외적으로 대학 4년 충실하게 보내려 했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연극 연습에 한창이었다.

주임교수 수업을 2주 정도 빠질 상황이었다.


주임교수 고형곤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술을 사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며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의 인연으로 기자도 했고,

대학 교수와 총장도 했으며,

강성 야당 국회의원을 지내다

설악산에서 자연인의 삶을 살기도 했다.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 괜찮아.” 라며 이순재를 격려해준 말은 고형곤이 삶과 가치관을 응축시킨 표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쑥스러울 멋부림이 아니었다.


이순재는 고형곤의 격려에 자신감을 얻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주제로 졸업 논문을 냈다.

최종 학점은 아쉽게도 C.


같은 과를 졸업한 김영삼은 칸트에 관한 소고로 졸업 논문을 냈다.

칼같이 지켜지던 김영삼의 유별난 시간 약속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이순재의 첫 연극은 <지평선 너머>였다.


서울대에 연극부가 있었지만 운영 소홀로 없어진 터였다.


이순재는 평생지기 이낙훈과 함께 학교 본부에 찾아갔다.

각서까지 써가며 연극부를 재건해냈다.


1957년 입대 영장 날라왔지만 이순재는 연극에 미쳐있었다.

연극 하나만 더 하고 입대하려 구청에 찾아가 거짓말을 했다.


#3 제도권 너머

이순재는 천성이 반듯한 사람이다.

남을 속이기보단 남한테 속는 게 어울린다 하겠다.


거짓말도 재주가 있어야 했다.

서류상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홀어머니 모시고 장사를 해야해 한 달 정도 말미를 달라 했다.


담당 공무원도 웃으며 속아준 격이었다.

실제 한 달 정도 연기되어 연극을 마치고 1959년 입대했다.


이순재는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이해랑의 명동 동방살롱에 갔지만 입단에 실패했다.

국립극단 입단도 실패했다.


연극의 제도권 진입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자 이순재는 “에라, 우리끼리 하자” 하며 소극장운동을 펼친다.


유명한 ‘실험극장’의 시작이었다.


연극에 미친 대학생들이 실험도구를 자처하며 종로 아세아빵집에서 모였다.

이후 실험극장은 이순재, 이낙훈, 오현경, 박정자, 나문희, 여운계, 송승환, 최민식 등 배우계 레전드들을 배출해냈다.


그럼 이순재는 이 때 왜 영화배우를 못했을까?


텔레비전 보급 전이었고 방송국도 없던 때다.

TBC 공채 탤런트 1기는 나중 얘기다.


195,60년대 한국영화는 상종가였다.

신성일, 신영균, 엄앵란, 김지미 같은 은막의 스타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순재는 신인 배우로서 낄 틈이 없었다.


외국 영화 감상으로 드높아진 안목도 한 몫 했다.

이순재 눈에 국내 영화는 예술로는 시시했다.


그래서 이순재는 다짐했다. “그래, 연극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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