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개항도시 인천과 민족사학 중앙고

by 변우현의 인물당

#1 인천

최불암은 1940년 인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최영한이다.


부친 최철과 모친 이명숙의 외아들이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단출한 가족 구성이었다.


부친은 임시정부에 있다던 동생을 찾아 상하이로 떠났다.

조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가족도 중국으로 갔다.


모친과 최불암 단 둘이 인천에 남았다.


부친이 보내오는 돈이 부족했다.

삶의 궁핍은 최불암 모친을 인쇄소로 몰았다.


모친은 일하러 갈 때면 최불암을 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최불암은 문 밖에서 문고리를 닫아걸던 소리가 생생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방에 남은 최불암은 장지문에 구멍을 뚫고 바깥 구경을 했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동정 어린 시선도,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놀리던 모습도 지켜봤다.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속에서 상상을 펼치며 최불암의 연기는 시작되었다.


해방 후 최불암 부친이 귀국했다.


중국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중국인 여배우를 데려왔다.


그 충격으로 모친은 가출했다.


요즘엔 첩을 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암암리에 용인되던 시절 또한 멀진 않다.


영부인 육영수는 부친 육종관의 둘째 딸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육영수는 뛰어난 수완과 개명된 사고방식을 갖춘 부친을 존경했다.


하지만 축첩엔 상처가 컸다.

육영수가 서울 배화여고보 유학 시절 육종관의 작은부인집에서 살았던 경험은 적잖은 한이었다.


최불암 부친은 당황했다.

중국인 여배우를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가족은 극적으로 재결합했다.


#2 아버지

부친은 인천에서 신문사와 영화사를 시작한다.


당시 '인천일보'라 불렸다는데 현재 있는 인천일보와 관련은 없다.

부친 회사에는 신카나리아, 복혜숙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최불암 국민학교 2학년 때 부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부친의 첫 작품 영화 <수우> 시사회를 앞둔 상황이었다.

최불암은 시사회장에서 부친의 영정을 들고 영화를 시청했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모친은 또 다시 생활 전선에 나섰다.


일단 집을 처분했다.

그 돈으로 인천 동방극장 지하에 ‘등대뮤직홀’이라는 음악다방을 열었다.


극장 지하 음악다방 아들이라는 특권으로 최불암은 극장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이때 영화를 보는 안목이 트였다 최불암을 회고한다.


이후 모친은 인천 장사를 접고 서울 왕십리로 이동했다.

이때 최불암은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왕십리에서 중앙고가 있는 계동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3 중앙고

중앙고 입학은 최불암 연기 세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앙고에 대한 인식은 세대마다 차이가 있다.


최근엔 아이돌그룹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 MV 촬영지로 유명했다.

한 땐 <겨울연가> 배용준 모교 배경지로 유명했다.


유명한 화강암 석조 양식은 이사장 인촌 김성수의 집념이었다.


중앙고는 민족사학이다.

숙직실에서 3.1 운동 독립선언문이 작성됐다.


한국 국제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린 이용희는 부친이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이갑성이었다.

자아가 강했던 이용희는 경성제1고보나 경성제2고보가 아닌 중앙고보를 선택했다.


중앙고는 의리가 강하다.

중앙고 야구부가 약체였다.


자율야구 전도사 이광환을 감독으로 데려오려 했다.

박지만(대통령 박정희 아들) 포함 많은 동문들이 움직였다.

이광환이 근무하던 한일은행을 설득시켰다.


중앙고는 주먹이 쎘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4전 5기 복서 홍수환도 중앙고 출신이다.

현대중공업 정몽준 회장도 중앙고 시절 교내 써클 주먹들과 삼청공원에서 맞대결했다는 일화를 회고했다.

그리고 '민족사학'과 '의리'와 '주먹'이란 키워드는 최불암에게 중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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