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은 타고난 피지컬이 월등했다.
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 때 선생님들은 3학년으로 착각해 반 배치하기도 했다.
최불암은 중앙고 야구부도 했을 만큼 운동도 즐겼다.
덩치 큰 친구 몇몇과 중앙고에 ‘세븐클럽’이란 걸 운영했다.
일종의 자경단이었다.
버릇없는 후배를 교육하거나 중앙고 학생을 괴롭히는 타교생들을 막아냈다.
드라마 <수사반장>이나 <그대 그리고 나>에서의 최불암의 터프한 캐릭터는 우연이 아니었다.
최불암은 중앙고 연극부 활동을 계기로 서라벌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중앙고 시절부터 단짝인 김기팔과 평생 교류했다.
김기팔의 본명은 김용남이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지만 최불암과 함께 서라벌예대 수업을 즐겨 들었다.
대한민국 PD 1호 최창봉의 눈에 들었고,
동아방송과 MBC를 거치며 정치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
드라마 <제1공화국>은 김기팔이 각본을, 최불암이 주연 이승만을 맡았다.
야구로 치면 환상의 배터리였던 셈이다.
1955년 최불암 모친은 명동에 선술집 ‘은성’을 열었다.
부친의 인맥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인 등 문화 예술인들의 명소가 됐다.
은성이 있던 자리에 남긴 표지석은 지금도 명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당 필독서 <명정 40년>의 변영로는 ‘은성’의 최고 원로였다.
대학생 시절 최불암은 변영로가 내준 술을 마신 적도 있다.
평소처럼 들이켜곤 술 찌꺼기를 바닥에 털어냈다.
술에 진심이었던 변영로가 대노해 최불암 목덜미를 후려쳤다.
1963년 최불암은 군에서 제대했다.
서라벌예대 동기들은 자리를 잡아갔다.
최불암은 방황했다.
부산에서 염색공장을 하던 숙부의 배려로 취직도 했다.
몸은 편했다.
이내 적응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자존감이 강했기에 좌절도 깊었다.
불면, 폭음, 줄담배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자살까지 고민할 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최불암은 우연히 마포 현석동 인근 교회에 들어선다.
처음 만난 목사의 조언으로 의지를 되새겼다.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잘 될 거란 확신이었다.
이 다짐은 국립극단 시절 연극 <이순신>에서 돋보여진다.
순풍산부인과의 오지명이 주연 이순신을 맡았다.
최불암은 율포 만호를 맡았다.
비중은 작았다.
최불암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 시절 극중 갑옷은 엉성하게 양철 조각을 덧붙였다.
툭하면 비늘이 빠졌다.
최불암은 청소를 자청했다.
떨어진 갑옷 비늘들을 주워 모아 자신의 의상에 열심히 붙였다.
최불암은 대사 처리가 안되던 후배에게 찾아갔다.
대사 절반만 내어달라 간청했다.
공짜는 아니었다.
수중의 돈을 다 털어 술까지 사가며 대사를 받아냈다.
연출자에게 혼도 났지만 인정도 받았다.
그리고 이때를 계기로 평론가들에게 최불암 연기는 본격적으로 인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