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당 합당은 일본 자민당 1.5당 체제의 벤치마킹이었다.
국민들이 놀란 건 1.5당 보수대연합 자체만은 아니었다.
보수대연합 같은 유식한 말로만 놀래키기엔 어려운 구석이 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군정 종식’ ‘선명 야당’을 내세웠다.
선이 굵고 화끈했다.
그런 그가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했다.
3당 합당을 두고 ‘배신’, ‘변절’, ‘야합’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비난들을 노태우와 김종필도 오순도순 1/3씩 나눠받진 않았다.
오롯이 김영삼만을 향한 비난이었다.
정치적 치명상이 컸다.
통일민주당 내부서도 회의적인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노빠꾸다.
초산 테러에도 결연했고 김태촌 도끼에도 의연했다.
정치에서 명분은 샅바싸움이다.
노빠꾸엔 명분이 있었다.
김영삼이 평생 못 겪어본 어색함이었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모두 잃게 될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대선 후보를 꿰차고 당선까지 해내는 저력을 과시한다.
김영삼의 당내 투쟁이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으로 인식됐다는 분석도 있었다.
똑똑한 얘기겠지만 결과를 다 알고 보는 스포츠 하이라이트 같은 느낌이다.
중간평가라는 말이 생겼다.
대선 5년과 총선 4년의 선거 주기가 달라서 일어나는 일이라 했다.
노태우와 민정당 입장에선 안정적인 정국 운영도, 퇴로 확보도 불확실해진 상황이었다.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노태우는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에게 먼저 연락한다.
투사적 이미지와 달리 김대중의 온건 지향성을 노태우는 알고 있었다.
김대중은 야권 내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거부한다.
노태우는 김영삼에 정서적 거부감이 컸다.
박정희가 김영삼에게 시달렸던 걸 봐온 탓이었다.
하지만 김종필의 제안에 박철언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연락한다.
김영삼은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왜 그랬을까?
통상적인 야권 통합 방식으로는 대통령 후보가 되기 어렵다는 김영삼의 현실적 인식이었다.
1971년 대선 경선에서 김대중의 승리는 상징적이지만 야권 내 조직세에서 김영삼이 늘 유리했다.
로프가 흔들대는 링 안팎의 프로레슬링 같은 상황이다.
김영삼은 김대중더러 당 안으로 들어오라지만 김대중은 쉽게 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김대중이 재야로 눈을 돌렸던 덴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987년 대선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김대중에게 진다.
김영삼 입장에선 노태우 당선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지 모른다.
질만한 경기를 지면 아프지 않다.
당연히 이길 거라 여긴 경기를 지면 누구도 제정신 차리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