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일.
천일수행을 하루 남겨둔 날, 나는 천왕봉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1000일 동안 매일 5.2킬로미터씩 산을 오르내렸다. 계단을 세고, 호흡을 재고, 몸의 리듬을 익혔다.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천왕봉 정상까지 15킬로미터,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올라가서 하나도 안 지치고 내려올 수 있을 거라고.
휴대폰은 녹화 중이었다.
아니, 녹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999일차, 이 날만 할 수 있는 특별한 라이브를 준비했다. 지리산 마고할머니 성모상 앞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그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결정적인 장면들을 남기고 싶었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3시간 40분 만에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힘들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심장이 떨리는 대로,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나는 올라가고 있었다.
장터목에서 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4시간 조금 넘어서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정상의 에너지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지리산인데, 천왕봉은 달랐다. 가슴이 뿌듯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배터리가 나갔다는 것을.
올라가는 내내 휴대폰이 열심히 녹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배터리는 진작에 나가 있었다.
999일차 그날만 할 수 있는 라이브, 마고할머니 성모상에서의 기도, 천왕봉으로 향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들. 모두 사라졌다.
황당했다. 당황스러웠다.
장터목에서는 잔뜩 찍어놨는데, 정작 정상에서는 아무것도 못 찍다니. 이게 뭐야. 너무 웃기잖아.
핸드폰으로도 찍을 수 없었다.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등산객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죄송한데,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제 휴대폰 전화번호 알려드릴 테니 나중에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찍은 사진이 두 장.
하나는 天王峯 1915m 표지석 옆에서 브이를 그린 사진.
다른 하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하늘을 껴안은 사진.
999일의 기록이 낯선 등산객의 카메라에 담겼다.
이게 불확정성의 대마왕이 만든 999일차의 결정판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해 지겠다.”
분위기가 좋아서 정상에 좀 더 머물렀다. 그러다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내려가는 길이 문제였다.
무릎 연골에 부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4킬로미터쯤 남겨놓고 생각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그때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엉금엉금 기듯이.
2.5킬로에서 3킬로 정도 남겨놨을 때, 앞에서 젊은 부부가 보였다. 부인이 연골 때문인지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오고 있었다. 친정엄마인지 시엄마인지 모를 어른과 남편이 함께였다. 완전히 거북이 걸음이었다.
‘잘됐다.’
나도 그들과 템포를 맞춰 엉금엉금 내려왔다.
그런데 젊은 부인이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먼저 내려가세요. 제가 느려서 일부러 기다리시는 거 같아서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처지예요.”
부인이 빵 터졌다. 남편도 웃었다. 우리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내려왔다.
입구 안내소에 도착하니 한 아저씨가 스프레이 파스 같은 걸 빌려다가 무릎에 뿌리고 있었다. 올라갈 때는 괜찮았는데, 내려오는 내리막이 무릎에 무리를 준 것이다.
총 9시간이 걸렸다.
원래 예상은 6시간. 넉넉잡아도 8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15킬로를 왕복하는 데 9시간. 평상시 내가 다니던 거리로 계산하면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8시간이면 됐을 텐데.
성큼성큼 빠르게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운동을 했으면 저렇게 쌩쌩할까.’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천일 동안 산을 오르내렸는데, 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야 할까.’
자만했나.
1000일 수련으로 충분히 단련됐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나.
무림에 고수는 넘친다. 알려지지 않은 무림의 고수들이 이렇게 많구나.
나도 성큼성큼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안 됐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러면 어때.’
남들이 볼 때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면 어때. 산행 처음 하는 초짜 같은 느낌을 보여주면 어때.
내 몸을 아끼는 게 더 중요하지.
그렇게 마음먹으니 편해졌다.
천왕봉 정상에 올라가 보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평소에 내가 오르던 산과 똑같은 지리산인데, 천왕봉 정상의 에너지는 달랐다.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뭔가 다른 그 느낌.
그래서 생각했다.
‘도전할 수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야겠다.’
999일을 채우고 나서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엉금엉금 내려왔지만, 다시 가고 싶었다.
무릎이 아팠지만, 또 올라가고 싶었다.
999일차, 천왕봉 등정에서 나는 세 가지를 얻었다.
**첫째, 배터리가 나간 황당함.**
완벽한 영상을 남기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났다. 대신 낯선 등산객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사진을 부탁했다. 그렇게 얻은 두 장의 사진이 999일을 증명했다.
**둘째, 엉금엉금 기어 내려온 겸손.**
날다람쥐처럼 올라갈 줄 알았는데, 거북이처럼 내려왔다. 무림에 고수는 넘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면 어때”라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셋째,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겠다는 다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정상의 에너지가 달랐기 때문에, 나는 다시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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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일차, 나는 천왕봉에서 깨달았다.
완벽한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순간을 받아들이는 힘.
빠르게 내려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을 아끼며 천천히 가는 용기.
끝을 맞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배터리는 나갔지만,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무릎은 아팠지만, 가슴은 뿌듯했다.
999일차는 그렇게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