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시청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직장 동료가 너무 부러워요. 결혼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그냥 살면서, 욕심이라고는 핸드폰 바꾸는 것뿐이래요. 내년에 신형 핸드폰 바꿀 생각하니까 행복하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그 순간 웃음이 났다. 그 동료분을 보며 '욕심이 타고나기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니.
욕심이 없는 게 아니다. 정체성이 확실한 거다.
내가 천일수련을 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이 정확하게 세팅되면,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그 동료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길이 정해져 있는 거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것들만 눈에 들어온다. 핸드폰 외에는 관심사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정체성이 확실하게 정해지는 게 제일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명확하면, 그와 관련된 것들만 소비하고, 만나고,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진짜 미련스럽게 하나만 판다.
하나만 딱 하고, 그 파는 시간에 집중해서 몰입해서 집약한다. 남들은 10년 동안 갈팡질팡할 것을 2-3년 안에 결판을 봐버린다. 그리고 또 다음 것을 향해 질주한다.
나도 그런 스타일로 살아왔다. 뭘 하나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 한다. 그것 외에는 안 한다. 완전히 거기에 대한 확실한 느낌이 들 때까지 파보고, 실증이 날 때까지 해본다. 그 선에 다다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딴 것을 한다.
이렇게 살다 보니 지금 나이 먹어서 보니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나는 뭐든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야."
이런 자기 신뢰감이 쌓였다. 이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오늘 또 다른 시청자가 물었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몸 상태가 바로 바뀌나요? 안 좋은 음식을 보면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이게 자기장이 흔들려서 그런가요?"
이건 아주 좋은 현상이다. 내가 '감각 문해력'이라고 부르는 능력이 잘 살아있다는 증거다.
감각 문해력이란 내 몸이 하는 소리를 즉각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을 섬세하게 느끼고 읽어내는 문해력 말이다.
성악가 조수미는 공연 후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리부터 몸 끝까지 완전히 말린다고 한다. 조금만 습기가 남아있어도 목에 이상 신호가 오기 때문이다. 습도 유지부터 집안 환경까지 극도로 예민하게 관리한다.
뮤지컬 배우 옥주현도 마찬가지다. 공연장 무대에 서면 습도와 먼지를 즉각 체크한다. 조금이라도 먼지가 날리면 바로 목에서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이게 감각 문해력이다. 내 몸을 읽는 센스가 섬세하게 살아있는 상태다.
반대로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감각 불감증에 시달린다. 웬만하면 찔러도 통증을 못 느끼고, 쓰레기 더미가 방치되어도 신경 안 쓴다. 인스턴트 음식을 처묵처묵해도 탈이 안 난다며 자랑한다.
이건 쿨한 게 아니다. 몸의 예산이 악성 적자 상태로 허덕이는데도 못 느끼는 것이다. 부도날 때까지 모른다.
감각 문해력을 키우는 것은 내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임이다.
보철적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뇌를 중심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이 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보철적 존재(Prosthetic Being)다. 옷을 통해 피부를 보완하고, 자전거와 자동차로 다리를 보완한다. 회사를 만들고 직원을 두는 것도 내 몸 하나로 할 수 없는 일을 분신들이 대신하도록 하는 보철적 확장이다.
사람도 보철적 존재로 활용할 수 있다. 가족의 가장이나 조직의 리더가 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이 사람들이 내 유기체의 일부분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몸이 확장되는 것을 알아차리면 점점 더 큰 내가 되어간다는 것이 느껴진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순간순간 경험하는 모든 것에 진심을 다해 온전히 몰입하되, 환경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을 바로 바꾸는 자세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관점을 견지하면 어제와 같은 삶을 못 살았다고 후회할 필요가 없다.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
마지막으로 한 시청자가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나 봐요"라고 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다. 나를 지각하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므로, 내 속의 나는 이미 유기체로 존재하고 있다.
혼자서 잘 논다는 것은 온 우주와 소통하고 있는 행복감을 누리는 것이다. 내 안의 에너지와 충만한 상태를 누리는 자족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