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묵상한 인카네이션의 본질
"성탄절인데."
첫 문장을 쓰고 멈췄다. 기념해야 하는가? 예수의 탄생이 오늘 살아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흔히들 말한다. 예수는 희생양으로 왔다고. 사랑을 가르치러 왔다고.
그런데 묵상 끝에 다른 답이 왔다.
성경의 본질을 다시 보았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피조물로 만든 게 아니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분신을 빚고, 그 분신에 자신의 영이 들어와서 자기가 만든 세상을 직접 경험하려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분신이다. 하나님 그 자체다.
예수가 온 목적은 희생양이 아니었다.
"나도 너희와 똑같고, 너희도 나와 똑같은 존재다."
이것을 알려주러 온 것이다. 신성을 회복하여 창조주로 살 수 있도록, 자기로 살다 가는 법을 알려주러.
예수만 그런 게 아니다. 석가모니도, 노자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인내천", "불성이 있다", "도는 멀리 있지 않다." 다 같은 맥락이다.
인카네이션(성육신)은 위대한 성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성육신한 상태다. 평범하고 초라해 보이는 일상이 바로 창조주가 물질계를 경험하러 온 현장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라. 작가들은 대단한 인물일수록 소소한 일상을 집중 조명한다. 왜? 모든 것을 다 가진 창조주는 오히려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더 소중하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들. 그것이 창조주가 맛보고 싶어하는 유일한 경험이다.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가 말했다.
"네가 네 장미에게 쏟은 시간이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거야."
수천 송이 장미 중에 왜 그 한 송이만 특별한가. 객관적 기준으로는 다 똑같은 장미다. 하지만 어린왕자가 그 장미에게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쳐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시간을 쏟았기에 그 장미만이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창조주가 이 물질계에 온 이유도 같다.
우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창조주가 왜 하필 이 작고 초라한 지구에, 이 평범한 일상에 들어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순간에 시간을 쏟기 위해서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누군가와 다투고, 화해하고, 웃고, 울고. 이 하찮아 보이는 순간들에 온 마음을 쏟을 때, 그것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경험이 된다.
사막여우의 말처럼,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물질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그것이 인카네이션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창조의 재미는 온갖 경험을 다 하는 것이다. 위대한 일만 가치 있고 초라한 순간은 잘못 산 것이라고 나누지 마라.
인카네이션의 본질은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상태다. "뭐든지 와 봐라, 뭐든지 즐겨보자."
하찮아 보이는 일상을 온 마음 다해 완전 연소할 때, 수많은 층위의 나들이 통합된다.
좋았던 나, 나빴던 나, 예수였던 나, 비참했던 나. 모든 나를 품어 안을 때 자기 정체성이 확장된다.
그것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창발 현상이 일어난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듯, 완전히 다른 존재로 각성한다. 입신의 경지, 통찰력이 열린다.
나는 세상 물정에 서툰 사람이다. 지적 장애에 가까울 만큼 일상생활에 엉성했다.
그런 내가 이제 비로소 인카네이션을 시작한다. 땅바닥에 발을 딛고, 삶을 혹독하게 경험하는 중이다.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시간을 쏟았듯이, 나도 이 평범한 일상에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성탄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와 똑같은 근원의 에너지임을 알려주러 온 것.
그리고 매 순간을 완전 연소하며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길이다.
네가 네 삶에 쏟은 시간이 네 삶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