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2026년 구정. 혼자 떡국을 끓여 먹고 앉아서 묵상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올랐다. "너 자신을 알라." 수천 년 된 화두인데, 갑자기 다른 결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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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쓴다. "자격지심이 있다"고 하면 스스로를 낮추는 열등감을 뜻한다. 그런데 글자를 뜯어보면 다르다.
자격(資格). 자기의 격.
지심(之心). 을 아는 마음.
자기 격을 아는 마음.
이게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와 같은 말이 아닌가. 자격지심은 열등감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자각이다. 관찰자로서 나의 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이 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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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서 관찰자 효과라는 게 있다.
입자는 관찰하기 전까지 어디에 있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관찰하는 순간 위치가 결정된다. 관찰자가 현실을 만드는 거다.
나는 이게 물리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비를 맞아도 어떤 사람은 "짜증나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운치 있다"고 한다. 같은 실패를 겪어도 어떤 사람은 주저앉고, 어떤 사람은 일어선다. 비가 달라진 게 아니고 실패가 달라진 게 아니다. 그걸 바라보는 관찰자의 격이 다른 거다.
삼라만상은 속성이 정해진 게 아니다. 관찰자의 격국에 따라 속성이 정해지며 상호작용한다.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자기계발 이야기가 아니다.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좋게 생각하면 좋아진다"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세상의 속성을 실제로 결정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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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관찰자의 격은 뭘로 정해지는가.
여기서 천부경의 구절이 떠오른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쓰임은 변하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심본태양앙(本心本太陽昻). 마음의 본질은 태양처럼 밝게 오른다.
근원의 나, 모든 순간의 나를 바라보는 그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본질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매 순간 변한다. 제철생기로 현현한다.
그래서 매 순간의 관찰자의 격은 제철생기의 격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 올해의 내가 작년의 나와 다르다. 그런데 그 모든 나를 관통하는 본질의 나는 같다. 변하는 나와 변하지 않는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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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수련 동안 나는 수많은 나를 만났다.
십계명을 받은 날의 비장한 나. 진드기가 싫어서 대성통곡한 나. "생기야 놀자!" 하며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닌 나. 비바람 속에서도 끄떡없이 걸은 나. "인류의 구원자"라는 망상에 빠진 나. 체육센터에서 최저임금 받으며 일하는 나.
예전에는 이 중에서 "진짜 나"를 찾으려 했다. 비장한 내가 진짜인가, 대성통곡하는 내가 진짜인가. 어떤 내가 더 높은 격인가.
틀린 질문이었다.
매 순간의 나가 그 순간의 전부이자 완전이다. 슬펐던 나, 화났던 나, 초라했던 나, 비참했던 나, 힘들었던 나. 그때 그 모습 그대로가 온전하고, 그 감정 그 상태를 완전히 만끽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본심본태양의 존재가 근원의 나다.
모든 순간의 나를 융합시키고, 범사에 모든 모습의 나를 모두 포용하는 내가 참나다.
아쉬움도, 미련도, 집착도, 어리석음도. 모든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모습을 모두 인정하는 상태. 그게 참나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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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아침, 혼자 끓인 떡국을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최저임금을 받으며 체육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사주를 보면 인생의 꽃이 피는 시기가 80세 이후라고 한다. 2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한때는 그 말에 조바심이 났다. "그때까지 뭘 하며 기다려야 하지?" 전국투어, 책 출간, 100개국 강연. 이런 미래를 벼르고 벼르며 "그때가 언제 올까"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다가는 끝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느니 지금을 즐기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꼼꼼하게. 침착하게. 차분하게. 느긋하게. 여유롭게. 몰입하고 집중해서 제철생기를 만끽하며 매 순간을 만들어가는 것. 그게 전부다.
떡국이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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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천일수련 이후의 일상 묵상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답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