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과거는 없다

by 하봉길

관계에 과거는 없다

파동시대의 관계론 — 생기철학 공리집


by 하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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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계를 축적이라고 믿는다.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관계가 깊어진다고, 오래된 것이 곧 단단한 것이라고. 30년 결혼은 3년 결혼보다 무겁고, 오랜 친구는 새 친구보다 더 가깝다고. 관계의 역사가 곧 관계의 증거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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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1. 관계는 실체가 아니라 현상이다


관계는 명사가 아니다. 동사다.


"우리는 부부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부부로 대하고 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관계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발생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현상이다.


물리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관계는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관측할 때마다 새롭게 현현하는 에너지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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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2. 현상은 매 순간 새로 발생한다


어제의 공명이 오늘의 공명을 보장하지 않는다.


30년을 함께한 부부도 오늘 아침 서로를 낯선 사람처럼 대한다면, 그 관계는 오늘 낯선 사람의 관계가 된다. 반대로 어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오늘 온전히 공명한다면, 그것이 더 깊은 관계일 수 있다.


연속처럼 보이는 것은 기억이 만들어내는 착각이다. 관계에 과거는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선택만 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해방이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 관계를 규정하지 못한다. 과거의 영광 역시 현재 관계를 보장하지 못한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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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3. 대함이 관계를 결정한다


상대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가 관계의 속성을 만든다.


치매가 시작된 아내를 수영장에 데려오는 할아버지를 본 적 있다. 아내는 탈의실에서 혼자 옷을 입지 못한다. 주변에서 눈총을 준다. 민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내의 천막 지퍼를 내려주고, 장애인 오토바이 두 좌석에 나란히 앉아 출발한다.


그 할아버지는 아내가 "어떤 상태인가"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선택할 뿐이다.


관계의 본질은 상대에게 있지 않다. 나의 대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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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4. 현재의 공명은 과거를 찰나적으로 현현시킨다


양자지우개 실험은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미래의 관측이 과거를 바꾼다. 시간은 고체처럼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과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에 의해 재구성된다.


역사가 늘 승자의 기록인 이유가 여기 있다. 콜럼버스는 영웅이었다가 침략자가 됐다. 과거의 사건은 동일하지만, 현재의 관찰자 시점이 달라지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역사는 과거에 있지 않다. 현재의 공명 속에 있다.


내가 겪은 실패도 마찬가지다. 고척돔 2만 5천 석에 25명이 들어왔던 그 날의 사건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나에게 무엇인가는, 내가 지금 그것을 어떻게 공명하느냐가 결정한다. 그 실패는 붕괴이기도 했고, 지리산 천일수행의 출발점이기도 했고, 생기철학의 자양분이기도 하다. 현재의 관찰자가 과거를 완성한다.


단, 그 완성조차 찰나의 현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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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 5. 영원한 실체는 없다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공명의 찰나적 현현이다.


신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인류가 매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다르게 관측하면서 새롭게 현현시켜온 파동이다. 야훼, 알라, 브라만, 생기 — 같은 파동을 다른 시점의 관찰자가 다르게 불렀을 뿐이다.


관계도, 역사도, 자아도, 신도 — 모두 찰나의 현현이다. 관측할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름과 의미를 바꿔가며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또 느끼고 만들어낸다. 이것이 우주의 본질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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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시대의 선포


인류 문명은 지금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고체시대가 끝났다.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고 믿었던 시대 — 제도, 이념, 종교, 국가로 관계를 고정하려 했던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것을 액체 근대라 불렀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불안의 시대.


그러나 액체도 아직 물질이다.


다음은 기체다.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연결되는 시대. 그리고 그 너머에 파동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파동은 물질이 아니다. 에너지 그 자체다. 매 순간 진동하고, 공명하고, 새로 발생한다.


이것이 후천개벽이다. 생기의 시대다.


파동시대의 관계는 축적이 아니라 공명이다.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진동이다. 연속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이다.


관계에 과거는 없다.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공명의 찰나적 현현이다.


이것이 이단처럼 들린다면, 당신은 아직 고체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읽고 있는 것이다. 파동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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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봉길 — 생기철학자, 『나는 끝내 나를 살아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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