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않아도 괜찮다

by 하봉길

깨닫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살아내고 있으니까


부처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퇴근길에 치킨 한 마리 사들고 집에 들어서는 아빠는 — 깨달은 적이 없다. 수련도 안 했고, 참나를 찾으러 산에 간 적도 없다. 그냥 오늘도 버텼고, 집에 가는 길에 아이 얼굴이 떠올랐고, 치킨 박스를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 연꽃이다.


· · ·

중용(中庸)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상태. 동양철학이 수천 년 동안 가장 높은 경지로 꼽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걸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론을 배운 적도 없이, 중용이라는 단어를 모르면서도.


직장에서 갈굼 당하고, 분통 터지고, 씩씩거리며 퇴근하다가 —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딴다. 한 모금 마신다. '에이 씨, 그래도 내일 또 가야지.' 그리고 집에 들어선다.


그게 중용이다. 무너지지도 않고, 폭발하지도 않고 — 분노를 완전히 태우고 나서 다시 균형으로 돌아오는 것.


· · ·

물리학에 전기중화(電氣中和)라는 원리가 있다. 양전하와 음전하가 만나 균형을 이루는 것. 자연은 언제나 이 균형을 향해 움직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힘든 하루(-)가 쌓이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그것을 상쇄시키는 것(+)을 찾아낸다. 이론이 아니라 본능으로.


치맥이 그것이고, 아이 웃음소리가 그것이고, 퇴근 후 친구와 소주 한 잔이 그것이다. 월급 입금되자마자 가족 식재료 먼저 주문하는 것도 그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 가르쳐주지 않아도 — 전기중화를 하고 있다.


잘 보면 그 흔적이 곳곳에 있다.


직장인의 컴퓨터 바탕화면. 책상 위 액자. 지갑 속 사진 한 장.


누가 하라고 한 게 아니다. 이론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다들 알아서 설치해놓았다. 갈굼 당하고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는 순간 — 바탕화면에 아이 웃는 얼굴이 뜬다. 그 0.1초에 전기중화가 일어난다.


말 한마디 없이, 의식도 없이. 직장인의 바탕화면은 — 본능이 설치해놓은 생기충전소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탁기가 되고 병이 된다. 그런데 매일의 고달픔을 치킨 한 박스로, 아이 미소 한 번으로, 바탕화면 사진 한 장으로 조금씩 태워내는 사람은 — 탁기가 쌓이지 않는다. 완전연소가 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 ·

그런데 이 양기는 어디서 오는가.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눈 먼 프랭크 중령은 권총을 손에 쥔 채 말한다.


"살아야 할 이유를 대봐."

거창한 답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탱고를 춰야 한다는 것, 페라리를 한 번 더 몰아야 한다는 것 — 그 작은 이유 하나가 방아쇠를 내려놓게 했다.


살아낼 이유는 원대하지 않아도 된다. 퇴근길 치킨 한 마리여도, 내일 아침 아이 얼굴이어도, 바탕화면 속 그 웃음이어도 — 그 이유가 분명해지는 순간, 양기가 발동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오르는 내내 힘들다. 땀이 나고, 다리가 떨리고, 그만 내려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계속 오른다. 정상에서의 그 한 순간을 알기 때문이다. 그 보상이 오르는 과정의 모든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걸 — 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든 삶을 버텨내는 것도 같다. 살아낼 이유가 분명한 사람은 음의 기운이 쌓일수록 오히려 더 강한 양기가 발동된다. 그 이유가 전기중화의 원천이다.


살아내려는 생기(生氣)가 있는 사람은 쓰러지지 않는 게 아니다. 쓰러질수록 더 일어서게 설계되어 있다.


· · ·

제철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억지로 키운 것이 아니라, 그 계절에 그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것. 봄에는 봄나물이, 겨울에는 굴이 제맛이다.


삶도 그렇다. 힘든 날은 힘든 날의 에너지가 있고, 웃기는 날은 웃기는 날의 에너지가 있다. 갈굼 당한 오늘도, 손님한테 '왜 이렇게 항상 웃으세요?' 소리 들은 오늘도 — 다 제철이다.


완벽한 날씨가 없듯이, 완벽한 하루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걸 알고 있다. 완벽한 날을 기다리지 않고 — 오늘의 날씨에 맞춰 옷을 입고 그냥 나간다.


· · ·

불교는 중생이 부처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행하라고 했다.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안내데스크에 서서 다른 생각을 했다.


중생이 부처인 이유가 — 깨달아서가 아니라, 이미 살아내고 있어서가 아닐까.


전기중화를 본능으로 하고 있고, 제철생기를 몸으로 알고 있고, 완전연소 후 균형으로 돌아오는 중용을 — 이름도 모른 채 매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바탕화면에 아이 사진 올려놓는 것도, 퇴근길 치킨 박스 드는 것도 — 다 그 실천이다.


부처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발견한 것이 — 어쩌면 그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 · ·

깨닫지 않아도 괜찮다.


살아낼 이유가 있는 한 — 당신 안에서 이미 생기가 발동되고 있으니까.


치킨 박스 들고 현관문 여는 그 순간에, 모니터 켜자마자 바탕화면 아이 얼굴 보이는 그 0.1초에 — 이미 연꽃이 피고 있으니까.


우리는 이미 — 살아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당신은 오늘 누구와 일상을 완전연소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