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상대가 불쾌하게 굴 때 겉으로는 참는데요, 속으로는 혼자 '너도 언젠가 당하리라' 하고 욕을 퍼부어요. 근데 그러고 나면 꼭 찜찜해지거든요. 그 나쁜 감정이 저한테 다시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찜찜하다.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이미 힘들게 참아냈는데, 참고 난 뒤에도 또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나쁜 감정을 품은 내가 문제인 건 아닌가'라는 자책까지 짊어져야 하는 건가.
나는 이것이 꽤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을 풀어보기로 했다.
먼저 한 가지를 짚고 가자.
속으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을 혼잣말로 중얼중얼 털어내는 것, 나는 농담 삼아 '궁시렁신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신공인 이유가 있다. 뇌과학이 그것을 뒷받침하기 전에, 우리 주변을 먼저 한번 둘러보자.
옛말에 "없을 때는 나랏님한테도 욕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고귀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뒤돌아서면 흉을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점심 자리에서 상사 욕, 퇴근길에 동료 뒷담화, 집에 와서 배우자에게 오늘 있었던 일 털어놓기 — 형태만 다를 뿐 다 같은 행위다.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리 순하고 온화한 사람도, 끼어들기 차량 하나에 순식간에 입에서 쌍욕이 나온다. 심지어 본인이 욕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5분 뒤에는 까먹는다. 핸들을 잡는 순간 돌변했다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지는 것이다.
뒷담화도 그렇다. 신나게 누군가 뒷담화를 하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꾹꾹 참고 한 마디도 안 한 사람이 집에 돌아가서 혼자 곱씹으며 더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우리 몸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렇다. 우리가 불쾌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면, 뇌의 편도체가 즉각 반응한다. 이른바 '투쟁 혹은 도주(fight or flight)' 반응이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심박수가 오르고, 몸 전체가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수백만 년의 진화가 새겨넣은 생존 본능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실제로 주먹을 날리거나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태반이다. 직장 상사 앞에서, 거래처 사람 앞에서, 심지어 가족 앞에서. 몸은 이미 전투 태세인데, 출구가 막혀 있다.
그때 뇌가 선택하는 대안이 바로 궁시렁거림이다. 속으로 중얼거리고, 혼자 욕을 퍼붓고, 상상 속에서 한마디 쏘아붙이는 것. 이것은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다. 뇌의 전전두엽에는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는 영역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감정적 자극을 받으면 그 기억이 작업기억에 임시 저장되어 계속 활성화된 상태로 남는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 창을 열어놓은 것처럼, 닫지 않으면 계속 그 자리에서 CPU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입으로 내뱉거나 글로 쓰거나 혼잣말로 털어내면 — 그 작업기억이 리셋된다. 창이 닫히는 것이다. 궁시렁거림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UCLA의 신경과학자 매튜 리버먼 연구팀은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 설령 혼자 속으로 내뱉는 것이라도 — 뇌의 각성 상태를 낮춰준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혀낸 바 있다. 말하고 나면 홀가분해지는 것, 뒷담화를 하고 나면 개운해지는 것이 다 이 이유다.
다시 말해, 궁시렁거리는 것은 나쁜 감정을 키우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면의 리셋 버튼인 것이다. 운전하면서 욕을 퍼붓고 5분 만에 잊어버리는 그 사람이, 사실 뇌를 가장 잘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공이 맞다.
아프리카 초원의 초식동물을 생각해보자.
사자가 달려들면 초식동물은 공포에 떤다. 당연하다. 그게 정상이다. 온몸으로 공포를 느끼며 전력으로 달린다. 속으로는 아마도 — 언어가 있다면 —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씨발, 너도 언젠가 당해봐라!" 뭐 그런 식으로.
그런데 한참 달리다가 멈추고 나면, 온몸을 한바탕 부르르 떨고는 태연하게 풀을 뜯는다.
지가 왜 달렸는지도 까먹고.
이것이 자연의 방식이다. 공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전력으로 반응하고, 그리고 완전히 비워낸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몸에 남지 않는다. '내가 저주를 퍼부은 게 잘한 건가?' 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다음에 또 사자가 오면 어떡하지?' 하고 미리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풀이 맛있을 뿐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생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초식동물의 스트레스 반응은 사건이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난다. 하지만 인간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그것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며 스트레스 반응을 스스로 연장한다. 초식동물에게는 없는, 오직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그런데 이것이 능력인지 저주인지는, 생각해볼수록 묘한 문제다.
초식동물은 풀을 뜯으면서 그냥 풀을 뜯는다.
인간은 풀을 뜯으면서 생각한다.
아까 내가 속으로 욕을 퍼부은 게 괜찮은 건가. 그 감정이 나한테 나쁜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나는 역시 아직 덜 성숙한 사람인 건가. 다음에 또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이 반추가 스트레스를 몸 안에 붙잡아 둔다.
초식동물이 5분 만에 완전히 털어낸 것을, 인간은 하루 종일 곱씹으며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지인이 '찜찜하다'고 느낀 것도 바로 이것이다. 속으로 욕을 퍼부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 그것을 '나쁜 감정'이라고 이름 붙이고 걱정하는 순간, 그 감정이 자기 안에서 더 오래 살아남게 된다.
관찰하면 사라진다고들 한다. 그런데 솔직히, 관찰하려고 의식을 집중하는 순간 오히려 그 감정이 더 또렷해지는 경험을 다들 해봤을 것이다. '화내지 말아야지' 하는 순간 더 화가 나고, '불안해하지 말아야지' 하는 순간 더 불안해진다. 관찰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개입이다. 감정을 대상화해서 보는 순간, 이미 그 감정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마음대로 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춰야 했다.
내 감정의 신공은 자연스럽다고 치자. 그럼 반대 경우는 어떤가.
끊임없이 궁시렁대는 사람. 늘 피해자처럼 굴며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사람. 자신의 불만을 남에게 쏟아내며 '이건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사람. 즉, 자기만의 신공으로 타인을 지속적으로 지치게 만드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해야 하는가. 그것도 그냥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니, 다 받아들이고 참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흘려보내는 것과, 그 감정을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쏟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초식동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 사자에게 쫓길 때 전력으로 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다른 초식동물 곁에서 매일 "나는 사자한테 쫓겼어, 그거 알아? 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지?"라고 반복해서 울부짖는 행동은, 이미 그것이 생존 반응이 아니라 습관화된 패턴이 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정서적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의 감정 상태가 주변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전파되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될 때다. 만성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 곁에 오래 있으면, 옆 사람의 뇌도 실제로 그 스트레스 반응을 함께 겪기 시작한다는 것이 연구로 밝혀져 있다.
그러니 타인의 반복적인 궁시렁거림이나 감정적 가스라이팅 앞에서 무조건 참는 것은 —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기 소모다.
자연스러운 것은 내 감정의 신공을 온전히 쓰는 것이다. 나 또한 초식동물처럼, 그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속으로 "씨발, 이 상황 진짜 별로네"라고 욕을 퍼붓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 때로는 자리를 떠나는 것, 때로는 조용히 그 관계를 정리하는 것.
중요한 것은 — 그 이후에 그것을 곱씹으며 자책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를 피한 것에 대해, 혹은 그 사람에게 욕을 퍼부은 것에 대해, "내가 나쁜 사람인가?" 하고 찜찜해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달렸다. 달려야 했으니 달린 것이다. 이제 풀을 뜯으면 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미슐랭 3스타 오마카세처럼 살라는 것이다.
오마카세가 무엇인가. 셰프에게 전부 맡기는 것이다. 내가 뭐가 나올지 통제하지 않고, 이 재료는 싫다고 개입하지 않고, 그냥 나오는 것을 받아먹는 것. 그 셰프가 미슐랭 3스타라면 — 굳이 내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
우리 몸이 바로 그런 셰프다.
몸이 움츠러들면 — 움츠러드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거부감이 생기면 — 거부감을 그냥 받아들이고. 속으로 욕을 퍼붓고 싶으면 — 욕을 퍼붓는 것도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잊는다.
성경 잠언 3장 6절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이 오마카세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좋은 것만이 아니라 — 공포도, 저주도, 분노도, 무기력도 — 전부 다.
우리는 '생기발랄'을 오해하고 있다.
밝고 긍정적이고 항상 웃는 사람 — 그것이 생기발랄이 아니다.
화날 때 화를 100% 내고, 슬플 때 슬픔을 100% 느끼고, 기쁠 때 기쁨을 100% 누리는 것.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100% 드러나는 사람. 그것이 진짜 생기발랄이다.
어린아이가 딱 그렇다. 방금 전까지 엉엉 울다가 사탕 하나 주면 까르르 웃고, 왜 울었는지도 까먹는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2000년 동안 교회에서는 이것을 '순수하게, 겸손하게, 믿음으로'라고 해석해왔다. 그런데 어쩌면 그 진짜 의미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화날 때 화내고, 슬플 때 슬퍼하고, 왜 달렸는지도 까먹고 태연히 풀을 뜯는 것 — 아무런 필터 없이 매 순간을 100% 사는 것.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상태 자체가 이미 천국이었던 것이다.
초식동물이 천국에 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천국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궁시렁거림을 통해 감정을 완전히 털어내고 나면,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나는 그것을 두고 '자기 안의 모든 나와 우아하게 화해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감정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눈다. 화를 낸 나는 나쁜 나, 친절한 나는 좋은 나. 욕을 퍼부은 나는 부끄러운 나, 참아낸 나는 성숙한 나. 이렇게 스스로를 둘로 쪼개놓고 한쪽을 억누르려 한다.
그런데 궁시렁거림으로 그 감정을 온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 쪼갤 것이 없어진다. 화난 나도, 욕하는 나도, 무기력한 나도, 다 같은 나다. 좋은 나 나쁜 나를 따로 두지 않으니,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내가 된다.
물리학에서 '통일장이론'이란 서로 다른 힘들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중력과 전자기력, 강한 힘과 약한 힘 — 겉으로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심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분노와 평온, 저주와 사랑, 두려움과 용기 — 이 모든 것이 분리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나에서 나오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속의 통일장이 완성된다.
그때 몸에서도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
뇌과학에서는 이 상태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된 상태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무언가를 억지로 처리하느라 뇌가 긴장해 있는 상태가 아니라 — 긴장이 풀리고 뇌 전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상태다. 이때 흥미로운 일이 두 가지 동시에 벌어진다. 몸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움직이고, 발이 먼저 나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리는 세세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생긴다. 나무 한 그루를 보는 눈이 아니라, 숲 전체를 조망하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존(zone)에 들어갔다'고 표현하는 상태, 음악가가 연주에 완전히 몰입해서 곡이 끝난 줄도 몰랐다고 하는 그 상태 — 그것이 바로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입구가, 놀랍게도 궁시렁거림이다.
억누르지 않고 털어내는 것. 좋은 나 나쁜 나로 나누지 않고 그냥 나로 받아들이는 것. 그 순간 심신이 하나가 되고, 몸은 최적화되고, 머리는 맑아진다.
초식동물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하고 있었다. 사자에게 쫓기며 온몸으로 두려움을 살고, 멈추는 순간 몸을 부르르 털고, 그리고 지금 이 풀 한 포기에 완전히 집중한다. 쫓겼던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두려워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여기, 하나의 자신으로 산다.
그것이 통일장이다.
그 지인에게 다시 말하고 싶다.
혼자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씩씩대는 것 — 완전히 괜찮다.
그것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몸이 자기를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다만 그 뒤에 걱정하지 말라. '내가 그런 감정을 품은 나쁜 사람인가?' 하고 곱씹지 말라. 그 곱씹음이 진짜 문제다.
달려야 해서 달렸다. 욕을 퍼부어야 해서 퍼부었다. 이제 그냥 풀을 뜯으면 된다.
지가 왜 달렸는지도 까먹고 — 지금 이 순간 풀이 맛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 — 그것이 지금 이 순간과 이어지는 유일한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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