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렸다. 가는 실비가 아니라, 온몸을 아낌없이 적셔오는 봄의 큰 숨결이었다.
하늘이 열린 틈새로 쏟아지는 생명의 언어였다.
나는 오늘도 모자 하나만 눌러쓰고, 우산 없이 산에 올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언제나 그랬다.
자연이 주는 모든 감각을 내 피부로 맞고 싶었다.
옷은 금세 젖고, 발끝에서부터 서늘함이 몸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 진하게 내 안으로 스며든 것은 숲속에 피어오른 향기였다.
비가 오면 유난히 더 짙어지는 그 풀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말 없는 생명들이 내쉬는 숨결들.
그것들이 나를 감쌌다.
마치 오래된 담요처럼, 축축하지만 따스했다.
산길을 오르던 중, 나는 미끄러졌다.
이끼 낀 바위 위에서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통증과 함께 순간적으로 불쑥 튀어나온 생각은,
"이 길은 왜 이렇게 험해?"
"왜 바위는 이렇게 미끄러워?"
나는 길을 탓했고, 바위를 원망했고,
입가엔 조용한 짜증이 번졌다.
빗물에 젖은 옷자락처럼 불만이 퍼져나갔다.
그때였다.
바위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수천만년 혹은 수억년의 침묵을 깨고 속삭였다.
"나는 그냥 여기에 있었을 뿐이야.
비가 오면 이끼가 피고,
나는 이끼를 좋아해.
그래서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나는 여기 살고 있는 존재고,
너는 지나가는 존재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만약 탓할 게 있다면,
그건 너겠지."
그 말이 마음에 꽂혔다.
화살처럼, 아니, 이슬이 풀잎에 머무르듯 진실이 가라앉았다.
그래.
나는 지나가는 존재였다.
잠깐 이 길을 걷는 나그네일 뿐이었다.
시간으로 치면 한 번의 숨결, 공간으로 치면 한 걸음의 자취.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묵묵히 존재해온 것들에게
불평을 쏟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그 자리에 '살고' 있었을 뿐인데.
태초부터, 어쩌면 말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그 기억은 문득 다른 장면을 데려왔다.
푸른 실타래처럼 풀리는 기억.
나는 산에서 자주 뱀을 만난다.
'1일 1뱀'이라고 할 정도로,
하루에 한 마리 이상은 꼭 만난다.
어떤 뱀은 소리도 없이 훌쩍 도망가고,
어떤 뱀은 몸을 틀어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뱀은 억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도망치다 맞은 머리를 흔들며,
말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네가 무서워한다는 이유로,
내가 맞아야 해?"
질문은 내 가슴에 메아리쳤다.
어느 날, 나는 산길을 걷다 큰 뱀 한 마리를 만났다.
그 녀석은 길 한복판에 대자로 버티고 있었다.
봄볕에 몸을 녹이는 고요한 의식 같았으나,
내겐 그저 방해물이었다.
나는 지팡이로 툭 쳤다.
"야, 왜 길 한복판에 있어? 비켜."
그런데도 뱀은 요지부동.
그래서 나는 더 세게 지팡이로 밀어 먼 데로 던져버렸다.
그 순간,
뱀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침묵 속에 새겨진 원초의 언어였다.
"여기가 내 집인데?
나는 여기에 살고 있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고,
네가 여길 지나가는 거잖아.
그런데 왜,
내게 '왜 여기 있냐'고 말해?"
그 말을 듣고 나니,
이 산을 걷는 내 태도 전체가 부끄러워졌다.
마치 옷이 벗겨진 듯 민낯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연 속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연을 내 '통로'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편하게 걷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 길 위에 있던 존재들은
걸림돌이었고, 장애물이었고,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실은 내가 침입자였는데.
그러나,
그들은 나보다 먼저 이곳에 있었다.
그들은 '존재하고 있었던 존재'였고,
나는 그저 '지나가는 존재'였다.
길이 험한 게 아니라,
내가 그 길의 시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위에게,
이끼에게,
뱀에게,
나는 미안해졌다.
내 마음이 감각의 비로 씻겨나갔다.
오늘 비를 맞으며,
나는 비로소 자연에게 고개를 숙인다.
산은 여전히 젖은 채로 묵묵히 거기 있고,
나무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나보낸다.
내가 뿌린 불평도,
그들에게는 그냥 빗물처럼 스며들어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내 오만도 이미 용서했을지 모른다.
나는 비에 젖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맑아졌다.
자연은 나를 꾸짖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은 천년의 지혜보다 깊었다.
"존재는 침묵으로 나를 가르쳤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나의 오만을 알았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리듯,
깨달음도 서서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