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체 시대,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차원의 관계

by 하봉길

공명체 시대,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차원의 관계



문득 떠오른 건 40년 전, 청년 시절 잠깐 친했던 친구의 얼굴이었습니다. 우연히 부산 영도 바닷가 등대에서 기타를 치며 놀다가 밤이 늦어졌는데, 갑자기 안개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등대 주변을 감싸면서 꼼짝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밀려오는 추위와 안개 속에서 두려워 둘이서 바짝 붙어 앉아 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고 날이 어스름 밝아올 즈음, 낚시꾼 아저씨 한 분이 우리 곁으로 오시면서 "여기서 밤샌 거야? 보드라운 짐승도 없이 남자 둘이?" 하며 웃으며 말씀하셨는데, 그 친구와의 그 밤의 장면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는 왜 수천 명을 만나고도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걸까요? 그리고 왜 깨알같이 많았던 날들의 수많은 사건들 중에 단 하루의 일이 평생 잊히지 않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공명'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공동체에서 공명체로 전환되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고체 시대의 끝, 기체 시대의 시작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세상의 모습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때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고, 결혼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은 '무조건적 사랑'의 상징이었고, 한번 정한 진로는 되도록 바꾸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가요?


평균 직장 근속 기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고, 이직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닌 성장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결혼은 평생의 언약이라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의 한 형태가 되었고, 이혼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는 늘어나고, 비혼과 무자녀를 선택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죠. 평생 한 분야의 전문가로 살기보다는 여러 직업을 경험하는 N잡러, 슬래시 커리어가 새로운 트렌드가 됐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트렌드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전환입니다. 저는 이것을 '고체 시대'에서 '기체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부릅니다.


고체 시대는 구조와 형태가 명확했습니다. 사회는 견고한 틀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은 그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마치 벽돌이 제자리에 놓여 건물을 이루듯,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전체를 지탱했죠.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했지만, 유연성은 부족했습니다.


반면 기체 시대는 형태가 자유롭습니다. 고정된 위치보다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가 특징이죠. 공간에 따라, 온도에 따라 자유롭게 팽창하고 수축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을 찾아갑니다. 예측하기 어렵지만, 훨씬 더 자유롭고 유연합니다.


"왜 사람들은 옛날만큼 의리가 없어졌을까?"

"왜 요즘 젊은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이동할까?"

"왜 관계가 이렇게 쉽게 시작되고 끝나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물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고체가 기체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공동체에서 공명체로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의 관계 맺기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공동체'는 주로 지리적 근접성이나 혈연, 제도적 소속감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마을 주민, 가족, 학교, 직장 동료... 이런 소속감은 '같은 곳에 있다'는 물리적 조건이 가장 중요했죠.


하지만 기체 시대의 '공명체'는 다릅니다. 공명체는 '진동의 일치'를 기반으로 합니다. 같은 곳에 있느냐보다는 '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비슷한 관심사, 가치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끌려 모이고, 더 이상 공명하지 않으면 쉽게 흩어지는 것이죠.


젊은 세대들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온라인 공간에서 만난 이와 깊은 우정을 나누고, 매일 얼굴을 마주치는 가족과도 소통이 단절되기도 합니다. 한때 ARMY, BLINK, ONCE와 같은 팬덤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것도, K-POP 아이돌과 팬들 사이에 일어난 강력한 '공명'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소속'을 중시했다면, 공명체는 '공감'과 '울림'을 중시합니다. 공동체가 '의무'와 '책임'을 강조했다면, 공명체는 '끌림'과 '진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일까요? 아니면 더 자유롭고 진정성 있는 관계의 시대가 열린 것일까요?


찰나의 공명, 영원한 각인


얼마 전 오래된 앨범을 정리하다가 중학교 시절 교회 여름 수련회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사진 속에서, 제 시선은 유독 한 친구에게 고정됐습니다. 지○○. 3년 내내 같은 교회를 다녔던 친구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교감이나 별 대화도 없었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얼굴만 유독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까요?


문득 떠올랐습니다. 교회 여름수련회 둘째 날 밤, 취침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홀로 숙소 밖으로 나갔던 순간. 어둠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조용히 앉더니 "별 예쁘지?"라고 물었습니다. 민수였죠.


우리는 그날 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약 30분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진로, 꿈, 가족에 대한 이야기... 평소에는 나누지 않던 깊은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사이로 돌아갔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만큼은 생생합니다. 30분의 짧은 만남이 50년의 시간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명의 힘'입니다.


공명은 어떤 관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느냐와 무관합니다. 얼마나 깊이 진동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심이 진심을 만나 울렸던 순간은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됩니다. 1년의 형식적인 만남보다 1분의 진실된 교감이 더 강력한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사랑해요, 나의 ○○○, 언제나 그리고 모든 시간 속에서."


제가 진정한 공명을 경험한 이들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저 아름다운 수사가 아닙니다. 진정한 공명이 일어났다면, 그 관계는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현실에서 더 이상 만나지 않더라도, 그 울림은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역사적 인물들 - 예수, 부처, 공자 - 과도 이런 공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가 내 안에서 울림을 일으켰다면, 2000년의 시간도 초월하는 연결이 생깁니다.


공명체 시대를 사는 법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요. 사람들은 금방 떠나가고, 관계는 쉽게 깨지고... 이 불안정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안고 계실 겁니다. 특히 고체 시대에 익숙했던 분들에게는, 기체 시대의 변화무쌍함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체 시대가 반드시 불안정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진실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이 변화를 바라보느냐입니다.


공명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몇 가지 통찰을 나누고 싶습니다:


1. 형식보다 본질에 집중하라


관계의 길이나 형식보다, 그 관계가 얼마나 진실되고 깊은지에 집중하세요. 수십 년 유지된 형식적 관계보다, 단 몇 분간의 진실된 만남이 더 값질 수 있습니다.


2. 떠남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습니다. 헤어짐을 두려워하여 만남의 깊이를 제한하지 마세요. 진정한 공명이 일어났다면, 물리적 이별 후에도 그 울림은 계속됩니다.


3.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라


미래를 계산하며 현재를 살아가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이 관계에 온전히 몰입하세요. 몰입은 훈련이 아니라 공명입니다. 온전한 몰입 속에서 가장 강력한 공명이 일어납니다.


4. 직관적 끌림을 신뢰하라


누군가나 무언가에 강하게 끌리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것은 당신의 내면이 보내는 공명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합리적 계산보다 때로는 이 끌림이 더 현명한 선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5. 소속보다 울림을 우선시하라


"나는 이곳에 속해있다"라는 안정감보다, "이것은 내 안에서 울린다"라는 진실에 더 가치를 두세요. 소속감은 일시적이지만, 진정한 울림은 영원합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희망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거대한 변화가, 사실은 인류 의식의 진화가 아닐까? 고체적 존재에서 기체적 존재로, 더 나아가 빛과 같은 존재로 진화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 변화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혼란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변환기에는 혼돈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그 너머에는 더 자유롭고, 더 진실되고, 더 깊은 연결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공명체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태는 사라지지만, 본질은 더 강해집니다. 벽은 무너지지만, 다리는 더 많이 놓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이 순간도, 어쩌면 작은 공명의 경험일지 모릅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울렸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공명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사랑해요, 당신을, 언제나 그리고 모든 시간 속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끝까지 나를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