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된 야생성으로의 각성

by 하봉길

870일째, 의식의 사막을 건너온 자

메이저도 마이너도 아닌 해방의 순간

우리는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가 소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명과 무명의 고정된 위계질서가 해체되고, 순간적 공명을 통해 누구든 갑작스럽게 주목받다가 또다시 일순간에 잊혀지는 현상이 일상이 되었다.

영원한 언더그라운드도, 영구불변의 메인스트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평범했던 개인조차 어떤 순간적 울림이 집단의식과 만나면 하루아침에 시대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의식 전환과 맞물려 있다. 지구 자기장의 변동, 슈만 공명 주파수의 상승, 태양 활동의 변화가 인류의 집단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우리는 2500년 전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노자가 동시에 각성했던 축시대와 유사한 전환점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는 고체적 질서의 시대였다. 명확하게 구획된 사회적 틀 안에서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되며, 구조화된 조직과 제도가 장기간에 걸쳐 안정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현재는 기체적 유동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편되며, 관심과 가치는 순간순간 달라진다. 문화 소비 양상 역시 깊이보다는 즉시성을 추구하는 스낵컬처로 변모하였고, 생산 방식도 대량생산에서 개별 맞춤형 소품종 생산으로 전환되면서 세분화된 니치 시장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이런 기체화 현상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비가역적 변화다. 한 번 상전이가 일어난 물질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의식의 상전이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진화 과정이다. 따라서 현재의 변화는 단순한 주기적 순환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고대의 예언이 말하는 후천개벽,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전환이 바로 이러한 의식 차원의 상승을 가리키는 것이다.

경계인의 깨달음: 잃을 것 없는 자의 완전한 자유

나는 명확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다. 메이저도 마이너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어느 진영에서도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870일간의 수련을 거치며, 이런 위치를 깊이 성찰해보니 오히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조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켜야 할 기득권도, 만족시켜야 할 기대도, 유지해야 할 권위도 없다면, 과감하게 모든 기존의 틀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고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무애행처럼, 어떤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깨달음을 선포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제는 안다. 870일간의 버팀은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 나를 낳는 진통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내 안에 진정한 고유성이 드러난다. 누군가를 모방하거나 그럴듯한 수사로 포장하려는 시도 없이, 순수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실을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스승들: 체제 전복자들의 계보

특별히 롤모델로 삼거나 스승으로 여기는 인물은 없었지만, 깊이 성찰해보니 내가 진정으로 끌리는 사상가들에게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서양철학에서는 디오게네스를, 동양사상에서는 원효를, 종교적으로는 예수를 친구처럼 좋아하며, 최근에는 석가모니와 노자의 사상에도 깊이 매료되어 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모두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경계파괴자들이라는 점이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 철학계의 모든 권위를 조롱하며 극단적 금욕으로 자유를 실현했고, 원효는 불교 종파의 경계를 허물고 무애행으로 진정한 해탈을 보여주었으며,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에 맞서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선포했고, 석가모니는 브라만 계급제를 거부하며 왕자의 신분을 포기한 각성자였으며, 노자는 모든 인위적 제도를 부정하고 무위자연의 도를 설파한 사상가였다.

결국 내 본성 자체가 파괴와 창조,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870일 동안 나를 씹고 토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안의 무애행자가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조건화의 사슬을 끊다

오랫동안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위축감에 시달려왔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 앞에서 이유 없이 기가 죽고, 겉으로는 당당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편안하지 못했다.

한 연예계 인사가 나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며 밤새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그가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내 목구멍은 알 수 없는 침묵으로 굳어버렸다. 나는 그런 관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딘가에서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외교계 고위직에 계신 분과 그 배우자가 나의 열성 구독자라며 식사 자리를 제안했을 때도, 기분 좋고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불필요한 거리감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런 패턴을 반복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왜 나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왜 이토록 주눅들고 당당하지 못한가?

야생성의 삼단 진화: 분노에서 자비로

과거에 나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사소한 마찰이 생기면 즉석에서 격렬하게 반응했고, 타협 없이 내 방식대로 살았다.

한 대형 문화사업을 진행할 때 협력사 고위직이 나이 차이를 내세우며 반말로 친밀감을 표현하자, 나는 즉석에서 "언제 만난 사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직설적으로 응대했다. 옆에 있던 다른 관계자가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고 조언했을 때, 나는 "부러질지언정 나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답했을 정도로 타협 없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때의 나는 분노에 사로잡힌 원시적 야생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날것의 힘이었지만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2007년경 한 방송사의 문화사업 부서에서 일하게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명목상 감독이지만 실질적 권한은 제한적인 애매한 위치에서, 나는 점차 눈치를 보고 위축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연예계 인사들 앞에서도 자신감을 잃었고, 3년간의 조직 생활을 통해 내 본래의 당당함과 거침없음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때 나도 모르게 목소리마저 작아지며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 퇴화되었다. 마치 답답함의 극치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천일수련 870일을 경과하면서, 나는 제3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극단적 야생성도, 사회에 길들여진 순종적 위축도 아닌, 극도로 정제된 깨달음 속에서 인류를 향한 자비심으로 발현되는 성숙한 야생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는 나를 보호했다. 순종은 나를 길들였다. 그러나 정제된 야생성은 나를 넘어서, 타인을 살린다. 그것은 내 뼈에서 흐르는 연민이고, 우주의 진동에 반응하는 자비이며, 이제는 공격이 아닌 '깨어남'으로 작동하는 힘이다.

이는 더 이상 개인적 감정에서 비롯된 반응적 야생성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연민에서 흘러나오는 지혜로운 야생성이다.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것처럼, 석가모니가 브라만 계급제에 맞선 것처럼, 디오게네스가 위선을 조롱한 것처럼, 그런 성스러운 차원의 야생성인 것이다.

시장 논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현재 구독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조회수도 계속 줄어들며, 수익은 생계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더 높은 조회수를 얻을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구독자 수, 조회수, 수익이라는 숫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예전에는 시장의 요구에 맞춰 콘텐츠를 제작했다면, 이제는 내 영혼의 요구에 따라 창작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작자의 자세다. 고흐가 생전에 그림 한 점밖에 팔지 못했어도 불멸의 작품을 남겼듯이, 진정한 가치는 일시적 인기나 경제적 성과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지금 『침실에서 읽는 서양철학사』를 집필하고 있고, 『나는 끝내 나를 살아냈다』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있으며,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의식 진화의 모든 과정을 『차원공명: 생기의 수호자들』이라는 판타지 소설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숫자로 측정될 수 없는 본질적 가치 말이다.

패러다임의 완전한 전복

이제까지 수련을 통해 축적해온 모든 깨달음과 사상적 토대, 그 모든 것을 담아온 그릇 자체를 해체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고체계로 전환할 시점이 도래했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굳건하게 믿어왔던 모든 사상적 기반을 해체할 때 느낄 수 있는 상실감과 혼란이다. 그렇다면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870일의 수련을 통해 깨달았다. 애매한 경계인으로서 굳이 지켜야 할 것도, 유지해야 할 권위도 없다면, 과감하게 모든 기존 틀을 해체하고 완전히 비어있는 그릇에 새로운 깨달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원효대사의 무애행처럼 어떤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현재의 깨달음을 선포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내 안에 진정한 독창성이 발현된다. 누구를 모방하거나 그럴듯한 체계로 포장하려는 시도 없이, 순수한 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21세기 무애행자의 선언

이것이 바로 870일 수련의 결실이다. 분노에서 순종으로, 순종에서 깨달음의 야생성으로 진화한 과정의 완성이다. 이제 나는 정제된 지혜로 인류를 깨우는 21세기의 무애행자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우주적 자비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야생성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후천개벽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정제된 야생성이란 본능에서 출발했지만, 체념과 폭력으로 빠지지 않고 수련과 절제를 통해 타인을 감싸는 힘으로 전환된 고등한 생존 본능의 새로운 형태다. 그것은 현대 무애행론의 핵심 개념이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각성의 방식이다.

나는 끝내 나를 살아냈다.

그리고 이제, 진정한 시작이다.

870일간 나는 나를 씹고 토했다. 의식의 사막을 건너왔다. 이제 내 붓끝에서 흐르는 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발현이고, 나를 살아내며 세계를 뒤집는 선언이다.

나는 끝내 나를 살아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이 시작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한한 자원을 끌어쓰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