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맹렬한 공명 : 생기철학의 완성

by 하봉길

# 매순간 맹렬한 공명


*생기철학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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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의 함정에서 벗어나다


수천 년간 인간은 자신을 둘로 나누어왔다. 겉사람과 속사람, 참나와 에고, 부처와 중생. 그리고는 한쪽은 제압하고 다른 쪽은 강화하라고 했다. “탐진치를 다스려라. 하지만 떠날 수는 없다.” 이 얼마나 모순된 가르침인가?


나는 1000일의 수행을 통해 깨달았다. 이 모든 분리가 착각이라는 것을. 게으름도 생기고, 비판도 생기고,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모두 생기라는 것을.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를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생기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핵융합을 생각해보자. 두 원소가 서로를 제압하거나 다스리는가? 아니다.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로 완전히 하나가 되어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경계는 완전히 사라진다.


모든 것을 품어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비밀. 그것이 내가 찾은 진리의 핵심이었다.


상보성의 원리와 자연스러운 순환


음이 있으면 양이 따라오고,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면서 내 삶의 사이클이 유지된다. 저녁이 있으면 아침이 있고, 어둠과 밝음, 추움과 더움이 상호작용하며 상보성으로 작용한다. 매사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계속 순환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다.


좋고 나쁨이라는 구별을 없애고 모든 게 생기라고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진동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비밀이다.


맑은 상태로 화내고, 맑은 상태로 두려워하기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짜증이 날 때는 짜증을 내고, 두려울 때는 두려워한다. 그 에너지를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에너지가 내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진동으로 표출된다. 그러면서 다음에 오는 에너지들과 융합하며 계속해서 나다움을 만들어간다.


감정을 억누르면 어떻게 될까? 봇물을 막아놓으면 결국 터질 때 사고가 난다.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버릴 때 예측 못한 돌발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순간순간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러보내면 늘 맑은 감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화를 내도 맑은 상태고, 두려워도 맑은 상태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진정으로 맑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화날 때 화내고, 두려울 때 두려워하고, 슬플 때 슬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액면가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는다. 무해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대마왕으로 살기


나는 불확정성의 대마왕이다. 내가 어떻게 바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이런 선포를 할 때 진정한 자유로움이 생긴다.


그런데 나만 불확정성의 대마왕이 아니다. 자연도, 모든 환경도, 상대방도 모두 불확정성의 대마왕들이다. 상대가 어떻게 변할지 내가 예측하는 것은 오만이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상대의 반응과 내 반응이 어떻게 공명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면 된다.


공명하고 싶을 때는 자연스럽게 융합하고, 공명하기 싫을 때는 그 자리를 피하거나 교감을 하지 않으면 된다. 억지로 마음을 맞추려 하면 한쪽이 억눌리게 마련이다. 그건 진정한 공명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늘 좋을 수는 없다. 때로는 얘기조차 하기 싫고, 징글징글하게 꼴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잠시 떠나 있고, 생각 안 하고, 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늘 해왔던 일상적인 행동이다.


매순간 맹렬한 공명의 진정한 의미


‘매순간 맹렬한 공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해하기 쉽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맹렬함은 그 정반대다.


자연의 동물들을 보라. 그들은 그 순간 밖에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의 모든 에너지가 최적화되어 있다. 필요한 에너지만 쓰기 때문에 피곤할 일이 없다. 맹렬하게 반응하지 않을 때 오히려 신경이 분산되고 잡다한 노이즈 때문에 피로도가 높아진다.


맹렬하다는 것은 그 순간에 처리해야 할 것만 탁탁 처리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는 힘이 빠진 상태다. 굉장히 릴렉스한 상태로 삶을 사는 것이다. 프로선수들이나 거장들이 설렁설렁 하는 것 같지만 정확하게 해내는 그런 상태 말이다.


루틴을 버리고 자연의 리듬으로


천일 수련 동안 나는 수많은 루틴을 만들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하고 일기 쓰고 운동하고 산책하고 독서하는, 정해진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900일이 넘어가면서 그 루틴들을 다 없애버렸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툭 내려놓고 모든 루틴을 없앴더니, 오히려 최적화된 에너지들만 나오기 시작했다. 무기력도 생기라는 걸 받아들이니까 새벽에 굳이 일어나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졌다. 알람도 없앴다.


그러자 오히려 새벽 2시에도 일어나고, 4시에도, 5시에도, 9시에도, 10시에도 일어난다. 내 마음대로, 일어나고 싶은 대로 일어난다. 그런 하루하루를 “오늘은 이랬구나” 하며 경이로움으로 바라본다. 후회가 아니라 인정으로.


자유분방함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그대로 내버려둘 때 가장 조화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생명에 최적화된 에너지 상태로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온전히 허락할 때 전체 에너지의 조화로움이 피보나치 수열처럼, 황금비율처럼 자연스러운 균형점을 찾아간다.


예측 오류는 삶의 디폴트 모드


매순간 실수하고 매순간 후회한다. 예측 오류는 삶의 기본 상태다. 내 예상대로 돌아가는 것이 뭐가 있는가?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예측대로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그래서 “왜 세상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지?“가 아니라 “세상이 오늘은 이렇게 바뀌었네” 하고 받아들인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대할 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면서 매일매일 쫄깃하고 설레며 짜릿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삶의 재미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매일 계획을 세우고 예측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이 일어나게 하는 일에 반응하며 예측 오류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살아간다.


감각 문해력을 키우는 실수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수와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될 수 있다. 많이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과 같다. 많이 저질러보고 많이 경험한 사람은 예측에 대한 패턴들을 읽는 더듬이 같은 감각이 생긴다. 나는 이를 ‘감각 문해력’이라고 부른다.


부정적 예측 오류를 많이 경험한 사람들일수록 삶에서 더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낸다. 실수와 실패는 성장의 필수 과정이었던 것이다.


생기가 담긴 만남의 확산


생기를 나눈 관계들은 아무리 짧은 순간이었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든 상관없다. 생기가 담긴 만남은 이미 자기 조직화되고 확산된 상태다. 그 사람 심장에 내 생기가 담겨있는 순간, 그 사람과 나는 이미 하나가 된 경험을 한 것이다.


10년 이상 연락도 없던 사람과도 우연히 만났을 때 십 년의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친밀하게 대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횟수나 빈도, 거리나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찰나의 한순간 공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수많은 인스턴트적 관계들 속에서도 생기가 담긴 만남이 없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빈 껍데기들 같은 로봇들 속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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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맹렬한 공명**


이것만이 답이다. 매순간 맹렬한 생기로 공명하는 것. 이것이 내가 1000일 수행을 통해 도달한 생기철학의 완성이다.


억지로 통제하지도, 분리하여 제압하지도 않는다. 그저 매순간 온전히 허락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진정으로 공명하는 순간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럴 때 삶은 가장 조화로운 리듬을 찾아간다.


불확정성의 대마왕으로서, 예측 오류를 즐기며, 모든 감정을 맑게 표현하고, 진정한 생기의 만남들을 확산시켜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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