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2.
레퍼런스 이미지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비디오들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 방송사에 들어와 '타이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제목'이라고 생각했고 다들 그런 의미로 '타이틀'을 만들었다. '타이틀'을 만들 때가 되면 조연출들은 레코드실에 모여 LD라고 부르던 레이저 디스크를 뒤져 쓸만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외국 동영상들을 찾아 'Henry실'이라는 이름의 특수 영상 효과실에 가져가 부탁했다. '타이틀'은 프로그램 맨 앞에 전CM 앞에 들어가는 거니까 폼나게, 또는 화제가 되게 만들어야 했고 그 배경이 되는 이미지나 비디오는 무조건 남들이 한 번도 안 쓴 거여야만 했으니 제한된 소스들 가운데 새로운 거, 특이한 걸 찾기 위한 경쟁은 꽤 치열했다. 어디서 본듯한 타이틀을 만들어 가져 가는 날에는 선배의 날카로운 고함에 이어 인간적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는, 지금은 절대 접할 수 없는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을 들어야 했으니...
일을 시작하고 2년 후쯤 '테마게임' 조연출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도 "타이틀" 제작이었다. 기존 테마게임 타이틀은 3D CG를 백그라운드로 해서 자막이 올라간 거였다. 그게 뭔가 비인간적이고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아 뭔가 스토리가 들어간 타이들을 직접 제작해 볼 생각에 며칠 고민한 결과 "성냥팔이 소녀" 콘셉트의 타이틀을 만들기로 했다. 인천항 근처 폐공장, 자우림의 김윤아을 섭외하고 양초 300개를 준비해 스태프들과 도착하자마자 양초들을 벽마다 빼곡히 설치하고는 성냥팔이 소녀가 지쳐 잠들었는데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초에 쭉 불을 붙이고 나면 그 소녀는 새로운 행복한 모습으로 일어나 두리번거린다는 콘티대로 열심히 찍었다. 그런데, 지금 그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은 그걸 알까? 200개 정도 양초에 빛이 하나씩 옮겨 붙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카메라를 켜 둔 채로 크레인에 FD가 올라가 가까이로 움직여 초에 불을 붙인 후 완전히 Frame Out 되었다가 다시 그다음 초로 접근하는 걸 200번 가까이 반복했다는 걸...
그러다가 'title'이 영어권에서 '자막'의 의미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 또는 문화적 배신감이란... title sequence라고 해서 프로그램의 제목, 출연자, 제작진, 스폰서들을 적은 title 들을 죽 나열해 sequence로 만들었다는 의미일 텐데, 그동안 내가 눈이 빠지게 찾아 헤맨 이미지나 비디오들을 정확히 말해 background video 였던 거지. 간혹 어르신들 중에 title back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건 playback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암튼 정확히 말해서 Opening Title Sequence에 들어갈 Background Video 용 이미지와 비디오를 수집, 정리하거나 찍기 시작했다.
'사진'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뭐부터 찍을까?' 고민하다가 캐논 6D의 미러를 다양한 각도로 찍어 보기로 했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야 하니 Laowa 24mm EF 렌즈가 필요해 합정동 렌털 샵에 가서 12시간당 3만 5천 원에 빌려와 BMPCC 6K에 연결하고 조명들 다 켜고 세팅 완료. Laowa 에는 끝에 LED 조명이 이 있는데 써보고 나서 그게 왜 있는지 알았다. 내가 가진 Aputure Amaran 100X로는 원하는 노출이 나오지 않아 (이래서 더 크고 강력한 조명을 쓰는 거군 ㅠㅠ) 렌즈 앞 LED를 켜야만 피사체가 보이는 렌즈였으니... LED에 전원을 공급하는 USB케이블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렌털해서 썼으면 건들건들 접불이 나서 조심조심. 게다가 포커스는 수동. 자동 초점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당황스럽겠지만 그래도 수동으로 포커스 갖고 노는 재미를 알면 이건 별다른 단점이 아니다. 렌즈와 LED를 6D 미러 코앞에 대고 이런저런 이미지들을 찍어대고, 내부를 찍는 거로는 모자라 6D 외부까지 찍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 일요일 저녁이니까 쉬엄쉬엄 하긴 했지만 촬영 내용에 비해 시간을 좀 과하게 소비한 느낌이랄까.
렌털 장비를 반납할 때마다 느끼지만 렌털 샵들은 호황이다. 아마도 '유튜브'와 '넷플릭스' 덕분일 거 같은데, 역삼동(요즘 잘 나가는 '시현하다' 근처)에 있는 한포토는 강남에서도 높은 곳 고급 주택가들 사이에 넓은 주차장을 자랑하며 성업 중이고, 그거보다 주차장이 작긴 하지만 신사동 제이포는 프로간장게장에서 멀지 않은 번화가에서 잘 나가고, 오늘 내가 다녀온 SLR렌트는 로비에 렌털 예약한 물건들을 쭉 진열해 놓고 그 사이사이를 방송 영화 관련 학생과 유투버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잘할 자신도 없으면서 '역시 비즈니스는 렌털이 갑이야'를 중얼거리며 장비들을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로비에 도열해있는 Aputure 600d 녀석들 한번 봐주고 역시 속으로 '기다려라. 7월 중순에 Sky Panel이랑 함께 다섯 세트 렌털해 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