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1.
강력한 인내심과 원만한 성격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려는 호기심도 있으면 좋아요. 특히 상대적으로 숫자 개념이 약한 피디들은 고전하기 일쑤입니다. 90년대 중반에 회사에 들어가 만난 DOS 기반의 정산시스템이 생각나네요. 나름 최신 Windows 95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자신하고 살다가 회사의 DOS 시스템에 적응하려니 힘들죠. 말하자면 차 타고 편하게 다니다가 다시 마차를 고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콘텐츠진흥원에서 포맷_파일럿 제작지원을 받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 서류전형과 줌으로 진행한 면접을 통과해 나름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된 거니까요. 내가 낸 세금으로 지원을 받아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고 포맷으로 개발해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꿈에 한발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지원서를 접수하고, 수정해서 접수하고, 또 접수하고, 살짝 바꿔 접수하고, 프린트해 도장 찍어 스캔해 접수하고, 아까 올렸던 곳과 다른 곳에 또 처음부터 접수하고, 첨부한 파일을 수시로 열어 Ctrl-C, Ctrl-V 하면서 했던 등록 다시 하고 난 다음 싹 잊어버리고 한동안 기다리다 보면 서류전형에 합격했다는 이메일이 오고, 줌으로 만난 심사위원들께 내 프로그램을 잘 설명드리고 나서 운이 좋으면 며칠 후 제작지원작으로 결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돈을 받고 집행하는 단계는 서류를 접수하는 것과 차원이 달라요. 바로 강력한 e나라도움 덕분이죠. 제작지원금을 받으려면 여기에 내가 원하는 금액을 적고, 원천징수할 세금도 잘 계산해서 입력하고, 집행용도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잘 쓰고, 정산서류도 내가 속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잘 첨부하고, 국비로 할 건지 자부담인지 잘 구분해서 정리하고, 입금할 당사자의 개인정보도 잘 확인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저장'을 누르고 '집행요청'을 클릭한 다음 상위 메뉴로 올라가 '보조금 집행(이체)'를 선택해야 비로소 돈을 받고자 하는 사람 또는 회사의 통장에 돈이 꽂히게 돼요.
그나마 이건 초기 설정을 다 해뒀을 때 얘기고, 처음에는 아주 친절하게 e나라도움 메뉴의 이곳저곳을 다 다녀보게 배려를 해줘요. 입력을 다하고 마지막 단추를 누르면 '이체인증서 관리'에 가서 인증서를 등록하라 하고, 다시 입력 후 단추를 누르면 '펌뱅킹 이용신청'을 하라 하고, 한숨 한번 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입력 후 집행요청 단추를 누르면 '이체비밀번호'를 설정하라 하고, 이제는 마치 실성한 듯 픽픽 웃으며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 하듯이 입력하고 단추를 클릭하면 'OTP관리'에 가서 OTP를 등록 하래죠. 아니 왜 이걸 한 번에 얘기하지 않고 하나씩 요청하는지, 조금이라고 인내심이 약한 분들은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아요. 그래도 다행인 건 처음 입력하던 날 운세가 양호했던 편이라 '실실' 웃으며, 입으로 '픽픽' 소리를 내며, 책상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끝냈죠. 그래 봐야 1년이지만 적어도 이 프로젝트하는 동안은 다시 할 일이 없을 테니까 ㅠㅠ
암튼 그렇게 해서 지난달 말에 작가들 페이를 성공적으로 지급했어요. 마치고 나서 어찌나 뿌듯하던지...
오늘은 두 번째 시도로 내 인건비를 자부담금 (전체 제작비의 10%는 반드시 자부담)에서 정산하려 합니다. 일단 보조 세목을 선택하고 집행용도를 친절히 잘 입력하고 나서, 그동안은 굳이 필요 없었던 대표 근로계약서를 고용노동부 홈피에서 내려받아 내 이름 적고 회사 도장 찍어서 스캔해 대표 인건비 정산서류로 첨부한 다음, 총액을 입력하고 공제금액 그 밑에 적고 내 개인정보들 줄줄이 다 확인하고 나서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저장'과 '집행요청'을 누르니, 이체 담당자(=대표)가 본인 계좌에 넣는 거라 '승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메뉴에 있는 '본인 계좌 이체 승인 요청 관리'를 찾아 승인 절차를 해결하고, '보조금 집행(이체' 메뉴로 들어와 데이터들 다시 다 확인하고 '이체'를 클릭했어요.
"영업일에만 이체가 가능합니다. (주말 및 공휴일 이체불가)"
아, 참 친절하죠? 오늘이 토요일인데 관공서 시스템을 일 시키려 한 내가 잘못이긴 하죠. 입력하기 전에 좀 미리 얘기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건 내 생각이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스튜디오 답사 후 녹화 날짜 확정, 심사위원 섭외, 출연자 계약서 교환, 구체적인 미션 회의 등등 참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데, 회의 중 짬을 내 e나라도움에 접속해야겠군요. 가급적이면 업무시간 안에, 쓸데없이 또 밤에 하려 하지 말고...ㅠㅠ
p.s. 아 그리고 이 시스템은 업무 마치고 로그아웃을 꼭 해야지 저절로 되지 않아요. 몇 주 후에 들어가도 지난번에 로그아웃을 안 했는데 지금 할 거냐고 물어보죠. 때론 그게 왜 지난번에 로그아웃을 안했냐는 질책으로 들리기도 해요. 반드시 잊지 마시고... ㅎ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대말로 글을 쓰냐구요?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은 예감이... 내년에 또 지원해서 지원을 받아야 할 거 같기도 하구요 ㅎ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