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발설, 베아티투도 veatitudo
남편이 치매가 되고 보니, 불쑥 서러울 때가 잦다.
컴퓨터도 잘하고 만능이었던 남편 대신 내가 하나씩 배워 나가야만 한다. 모를 때는 조카가 알려주러 온다. 와서 잔소리는 더 많이 하고 간다. 인터넷에 맨 엄마들이 아이디를 모른다는 둥 한다면서. 컴퓨터를 새로 샀다고 하니 오빠랑 조카가 겸사겸사 왔다. 나는 온 김에 이것 좀 봐달라며 컴퓨터를 켰다. 영웅문 프로그램은 설치기사가 깔아줬는데, 내가 보던 창이 안 뜬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필요한 몇 가지만 불러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검색창에서 번호를 치고 불러냈다. 간단했다. 나는 이제 됐다고 했다. 내가 보던 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나는 '멘붕'이라고 그만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오빠는 추세선이니 뭐니 자꾸 끄집어냈다. 이걸 보라면서 추세가 무너졌다느니, 살아있다느니 한다. 오빠 딴에는 뭐 하나라도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놈에 나만의 질서'에서 벗어나면 정신이 혼란스럽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서 잭 니콜슨처럼 심한 건 아니라도. 그러고 보니, 그 배우는 왜 자꾸 나랑 겹치지? 지난번 <샤이닝> 때도 그러더니. 하여간, 그래서 오빠한테 그만하라고 됐다고 짜증을 냈다. 그랬더니 오빠도 집에 간다며 삐져서 가버렸다. 조카는 난처해하며 아빠를 따라 나갔다. 남편은 평소처럼 둘을 배웅하고 왔다. 나는 그 사이 벌써 울음이 터졌다. 울고 있는 나한테 남편이 왔다. "아이고 참 애기같이 또 왜 울어"
"이게 다 자기가 치매가 걸려서 그렇잖아. 자기가 치매가 아닐 때는 다 잘했잖아. 내가 뭐 이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써도 됐잖아. 이제 어떡해." 만만한 남편한테 퍼붓는다. 눈물은 멈추지도 않고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모든 것에서 갑자기 터진다. 나는 치매라는 폭탄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 나는 화약고가 되어 버렸다. 겉으로 멀쩡 한 거 같아도. 어디서든 불만 지펴지면, 불만 당겨지면, 나는 폭발한다. 나야말로 지각 변동이 되었다. 예전 평평하고 기름지던 땅은 다 매몰됐다. 치매라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 남편 뇌뿐만 아니라 영혼의 단짝인 내 뇌에 까지 일어났다. 이제 풀 한 포기 살지 못할 정도로 척박한 땅이 된 것 같았다. 분명히 복사뇌다. 복사 우주가 있다나? 그런 것처럼. 나한테도 그렇다. 뭐든지 치매의 안경을 끼고 치매의 틀에서 사고하게 된다. 치매라는 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 남편의 치매는 우주다. 끝도 알 수 없고, 광활하다. 우주에서 미아가 된 것처럼 나는 남편의 치매로 미아가 된 것 같다. 하나라도 건드려지면 온몸이 강도 7 규모의 지진이 난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설움이 폭발해서 울어야 한다.
마음에도 준설 작업이 필요하다.
울다 보니. 문득. 아, 이게 박혀있었구나. 이렇게 깊이 박혀 있었구나. 몰랐네. 나도 몰랐네. 그런데 굉장히 아팠나 보다. 이렇게까지 철철 우는 걸 보니. 서운했구나. 내가 어떻게 했는데... 싶은 서운한 감정. 돌아오지 않는 보상. 아니 태도. 따뜻한 말 한마디. 못 들었구나. 그게 아팠구나. 게릴라성 눈물이 멈췄다.
봤다. 됐다. 진흙탕 흙탕물 찌꺼기 진흙 뻘 바닥까지 싹싹 긁힌 건지 아닌지는 모른다.
어느 누구의 굴삭기냐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나를 긁는 '포크레인'은 늘 친정 식구다.
나는 친정집 따까리였다는 진실. 그 오랜 세월. 내 꿈을 펼칠 기회를 박탈당했었다.
나는 날아가지 못했다. 내 날개는 어딨는 걸까. '늦게 꽃이 활짝 필 팔자'라더니.
무슨 꽃이 활짝 피려고 아직까지 이렇게 아픈 걸까. 묻어 두고 싶다.
마음의 준설 작업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지진이 날 정도의 규모로 흔들렸던 마음은 어디 가고, 김치 맛있는 거 왔다고 또, 입맛 까다로운 오빠 주고 싶네. 이, 이, 이 온전치 못한 따까리 막내 유전자라니. 사람 안 변한다더니, 내 따까리 유전자는 변하지를 않네.
동기간이 뭔지. 이런 마음이면서 무슨 탈출이네 뭐네. 이러니 못 나가고 평생 친정따까리 했지.
이렇게 먹은 맘 없이 미련을 떨어대니 내 인생 영화가 <정복자 펠레> 일 수밖에. 그렇게 떠났어야 했다.
남편도 나도. 아픈 아버지 뒤로 하고. 다른 형제들처럼. 막내인 남편도 그렇게 떠났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나도 남편도 우리는 실패했다. 펠레를 부러워할 만하다. 떠나는 소년보다 남아있는 아버지가 가여웠던 우리의 시절. 측은함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젊은 마음.
우리 할아버지 닮은 배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 막스 폰 쉬도. 그를 남겨 놓고 떠났어야 했다.
영화 얘기 하는 거 보니. 다 울었다. 시원하다. 다 가라앉았다. 남편과 새로 주문한 김치를 통에 담는다.
"우와 맛있는 냄새다." 좋아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아이고 참 애기다 애기"하면서 웃는다.
나도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시원하게 울어놓고, 또 시원하게 웃었다.
내 눈 내가 찔렀다고 뭐 아프다는 말도 못 하나. 아픈 건 아픈 거고 찌른 건 찌른 거지.
우는 건 우는 거고, 웃는 건 웃는 거다.
입추인 오늘, 나는 알아챈다. 바람에 가을이 섞였다는 것을. 누구 보다 날씨를 읽는 감각을 지닌 나다.
그럼 된 거다. 글도 쓴다. 그럼 된 거다. 나는 내부 원인의 비밀을 알았잖아. 열쇠를 획득했잖아.
가끔 베아티투도를 느끼잖아. 지복(至福)의 상태. 오래가진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의 상태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 된 거다. 이제 막 초능력을 터득한 꼬맹이처럼 베아티투도를 느낄 때마다, 신기하다.
흔들려도 괜찮다. 예전에는 흔들리면 어디까지 나가떨어질지 몰랐다. 지금은 아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얼른 온다. 빨리 온다. 이거면 된 거다. 다른 아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또는, 다른 아픔은 너무나 강도가 약해서 하찮은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아픈 거지만, 내 아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런 아픔은 소꿉장난 수준인지도 모른다.
언니가 했던 말이 있다. 출산의 고통이 어마어마하니까, 출산을 돕기 위해 의사가 회음부를 절개한다. 근데 그건 그냥 따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큰 것이 오면 큰 것이었다 해도 덮이는 법이다. 자연법칙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 난다지. 나도 연잎처럼 코팅처리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