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재구성인가 망상의 시작인가
남편은 이제 저지레가 최고조에 이르는 일곱 살 사내아이가 되어가는 걸까. 잠시라도 눈을 떼면 일이 벌어진다. 며칠 전에는 휴대폰이 안보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늘 두는 자리에 스마트워치만 보였다.
"휴대폰 어딨어? 잃어버렸어? 헬스장에 놓고 왔어?"
나는 날카로워졌다.
"아니, 휴대폰 안 가져갔잖아"
멀쩡하게 눈 뜨고 본인 딴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겠지.
얼른 위치추적을 했다. 남편 휴대폰은 주민센터에 있는 것으로 나왔다.
전화를 걸어봤다.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에는 없음이 드러났다.
끊으려는데 누군가 받았다. 전화가 끊길까 봐 재빨리 말했다.
"남편 전화기예요. 치매라서 잃어버렸나 봐요."
"네. 여기 동사무소예요."
급한 나와 달리, 그는 느긋하게 남의 전화를 받아준다.
전화기를 보관하고 있으니 주민센터로 오라고 한다.
주민센터 가서 묻고 또 묻고 하기 싫었다. 나는 확답을 얻었다. 4번 창구로 오라고 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나갔다. 남편과 주민센터 가서 스마트폰을 찾았다.
전화기가 3층에 있었다고 한다. 3층은 수요일 시낭송 수업이 있는 강의실이다.
화요일에 헬스를 가다 말고, 왜 시낭송 수업하는 곳에 갔을까. 치매니까 그렇겠지.
간 것까지는 좋다. 왜 거기다 폰을 두고 나왔을까? 치매니까 그렇겠지.
그날 오후, 남편이 쓴 생활글을 봤다. 심상치가 않다.
군데군데 기억이 왜곡되었다. 사실과 다르게 기억이 재구성되어 있다.
이러면서 무슨 한국의 웬디 미첼이 되겠다는 건지...
내가 먼저 전화기 잃어버린 걸 알아채고, 전화해 보고, 동사무소 직원과 통화하고, 찾으러 나갔다. 이게 팩트다. 그런데 남편은, 전화기가 없다는 걸 본인이 알아챈 걸로 안다. 나와 함께 동선을 추적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동사무소에 들렀다고 썼다. 아내인 내가 "혹시 휴대폰 분실된 것 있나요?" 묻자, 동사무소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 휴대폰이 맞나요?" 내밀었다고 한다. "네 맞아요."
그렇게 해서 돌려받았다고 썼다. 공무원이 그렇게 고맙기는 처음이라나? 너무나 생생하게 써놨다.
이것은 금도끼 은도끼 휴대폰버전인가?
또 한 번 팩트는 이랬다. 내가 전화기 찾으러 왔다고 하자, 4번 창구 직원은 확인차 전화를 다시 걸라고 했다. 나는 전화했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남편 전화기가 울렸다. 그가 확인하고 돌려줬다.
이 일을 남편은 마치 산신령이 도끼 돌려주듯이 각색을 해놨던 것이다.
3년 써온 남편의 소설 실력이 왜 내 눈에는 '폐해'로 보답되는 것 같을까?
샤이닝의 잭 니콜슨처럼 심심했나? 눈 쌓인 고립된 호텔에 갇힌 <샤이닝>의 잭 니콜슨의 섬뜩한 원고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처럼, 남편 기억도 누더기가 되어 가는 걸까.
이렇게 망상이 시작되는 걸까. 물론 아직 망상은 아니다. 의사가 말하는 망상은 누군가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한다든가 하는, '없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남편은 '사실은 이랬다'라고 말하면, '아 맞다 그랬지.' 수긍도 한다. 남편은 아직까지는 <라쇼몽>의 '그들'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을 두고 인식은 그렇게 달라진다지 않는가. 망상은 아닐 거라고 부인하고 있는 나. 그렇다면, 남편 기억은 왜곡이고, 내 기억은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기억의 진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 왜곡된 기억이 남편한테는 더 견딜 만한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망각 속에서 서사를 재구성하는 남편의 글. 기억 속에서 진실을 건져 보려는 나의 글. 기억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만드는 남편의 방식. 기억을 붙잡기 위해 '기록'을 하려는 나의 방식.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존재를 지키려는 삶의 충동, 코나투스(conatus)를 실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이 태어나 3번 '확' 늙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서른넷'. 나는 그때 확연히 체험했었다.
치매도 그런가 보다. 어느 순간 '확'하고 떨어지는 시기가 오겠지.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권태라지. 적어도 키르케고르가 걱정하던 일은 나한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 덕분에 심심할 새가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