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 년
남편 휴대폰에 문자가 와 있다. 전혀 해당사항 없는 문자다. 몇 번이나 비슷하게 온다.
'제가 보험 들어 드렸잖아요.'
내가 제일 거슬려하는, 맥락 없이 암호 같은 문장.
아니 무슨 보험을 들어줬다는 거지? 모르는 사람이 보험을 대신 들어줄 수도 있나?
이런 게 보이스피싱이라는 건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보험 들어줬으니 보답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러면서도 나는 답답해서, 문자로 답을 보냈다.
"보험을 들어주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사람이 보험을 대신 들어주기도 하나요?"
잊었을 때쯤 전화가 왔다. 남편이 받았다. "네? 보험이요?"
전화를 받으며 남편이 나를 본다.
내가 손으로 가위표 신호를 보냈다. 끊으라고 목을 치는 시늉도 했다. 고음의 여자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내가 전화를 뺏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보험설계사라고 했다. 2년 전에 남편이 보험을 들었다고 한다. 실비보험과 건강보험해서 한 달에 십여만 원. 자동이체 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금시초문이었다. 전혀 몰랐다. 남편도 금시초문이란다.
맥락을 모르는 건 나였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이 너무나 화가 났다. 2년 차 치매 수용 단계다.
정황상 남편 사무실로 보험설계사가 방문한 것 같다. 직원들이 하나둘 보험을 드니 같이 들었나 보다.
문제는 그 사실을 나한테 그날 바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화가 난 핵심 이유다.
평소에도 말을 하지 않는 남편이다.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치매까지 있으니, 그 보험 든 일은 까마득하게 잊었을 것이다.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지른 일이 있으니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듯, 치매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나 대로, 나의 약한 고리에서 먼저 분노가 터졌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계산 도와드린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 자꾸 도와드린다는 둥, 들어 드렸다는 둥 말을 베베 꼰다. 그 불만이 왜 여기서 터질까.
보험설계사한테 무슨 보험을 자꾸 "들어 드렸다"라고 하냐 따졌다.
"보험을 들어줬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본인 동의도 없이 보험을 들어줄 수도 있는 건가요?"
그러자, 욕쟁이 할머니가 정색하고 "손님, 계산하세요." 존댓말 했다는 예처럼.
그제야 "남편분 본인이 직접 보험 들었다"라고 정정한다.
남편이 치맨데 무슨 보험을 드냐. 했더니, "그때는 치매가 아니었어요." 단언하며 받아친다.
자기가 무슨 의사야 뭐야.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방어를 가장한 공격태세다.
나는 말렸다. 그 여자가 불어대는 바람에 휩쓸렸다. 나는, 감정의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나갔다. 우리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 녹음되고 있다는 둥 해가며 씩씩거렸다. 종당에는 해지하겠다고 했다.
"네네 하세요. 전화해서 해지하세요"
그리고 서로 누가 먼저 랄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대패했다. 그 여자는 나를 약 올리고 조롱했다.
정작 왜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 묻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다 알게 되었다.
싸우는 과정에서 내용은 다 정리되었다. 언성만 높였다 뿐이지 설계사는 설계사답게 건강보험 액수와 실비보험 액수까지 다 말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남편 통화목록을 보니 남편이 그 여자랑 통화를 했었다. 들어봤다. 그 여자는 나를 다른 보험회사 설계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직장 그만둘 걸 모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남편 사무실에 경쟁사 보험설계사가 왔다가 마침 남편 전화를 대신 받아 통화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남편이 와이프라고 밝히자,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이,
"무슨 와이프가 그래요? 내 남편이 치매면 나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런다.
'뭘 내가 뭘 어쨌다고. 쳇 지가 뭔데. 그럼 아예 데려다 살든가.' 통화 내역을 들으면서 나는 또 '욱'했다.
수신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올해. 잊을 만하면, 그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물었다. "혹시 작년에 나랑 싸운 사람 아니에요?"
작년 추석 때쯤 일인데, 아직도 해지하러 못 갔다. 이래서 우리가 가난한가 보다.
우리가 쓰지 못하는 치매머니는 그 해지하지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묶여 있는 2년어치 보험금이다.
해지하면 0원, 해지하지 않으면 한 달에 십여만 원씩 들어갈 돈.
하지만 정작 우리는 보험 들 돈이 없다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치매머니'는 고사하고 '머니' 자체가 없다.
부모님 치매로 재산싸움 벌어지는 일이 있다지. 돈얘기는 돈 있는 사람 얘긴 줄 알았다.
돈 없는 얘기도 돈얘기이다. 적나라하긴 마찬가지다.
가스 밸브 잠갔는지 신경 쓰이듯, 자동이체 정지했는지 새삼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