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미 그림책, 지렁이빵
지나간 일이지만 교실로 초대해서 꼭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었다. 노석미 작가다. 학교에 예산이 없을 땐 작가를 초청할 수 없었고 정작 예산이 생겼을 때 작가는 제주도에서 작업 중이었다.
한 해가 지나 다시 연락했지만 여전히 작가는 제주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 양평으로 올 때 강의 가능할까요
- 제가 실은...,., 어린이들 만나서 강의하고 이런 거를 잘 못해서요.....
초대는 불발됐다. 아쉬워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작가는 전시회 때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난 어린이들과 노작가의 그림책을 보고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이 작가에 빠져들게 했을까. 그림에서 느껴지는 단순함, 뜬금없음, 유아적 순수성 같은 것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렁이 빵>은 이상한 제목에 채도와 명도가 높은, 들뜬 분위기를 자아내는 표지를 하고 있다. 노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표지는 마음에 들었다.
첫 장면은 더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잘 아는 사이처럼, 늘 해오던 일을 하는 거처럼 친근하게 군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초록 눈 고양이는 꽤나 능숙하게 빵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글씨체에서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는 일로 빵을 했는데 오늘은 취미로 한다는 점을, 빼뚤 한 글씨를 통해 은근이 내비치는 거 같다.
이제 고양이는 빵 만들기에 돌입한다.
이 장면을 보면 나도 곧바로 빵을 만들 수 있을 거처럼 느껴진다. 유년 시절 어머니는 막걸리나 이스트 넣은 빵을 자주 만들어 주셨다. 막걸리나 이스트 넣은 반죽통은 아랫목 담요 속에 자리하곤 했다. 한참 뒤 반죽 덮은 그릇을 열면 봉긋하게 높이 부풀었던 반죽, 반죽은 순식간에 푸스스-- 김이 빠지면서 살짝 가라앉았다.
그 장면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스트'라는 말은 반죽이 부풀면서 곧 만들어질 빵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까지 부풀게 했던 마법 같은 낱말이었다.
어린이들에게 물었다.
-이스트를 왜 넣는지 아니?
-빵을 부풀게 해요!
어린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빵 만든 걸 본 적 있니, 같은 질문을 하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빵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많다. 다음 장면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래 장면은 이 그림책에서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장면이다.
- 이 장면이 어떻게 보이니? 또는 느껴지는 분위기는?
- 따뜻해!.
- 뭔가 낭만적이에요.
- 낭만적이라, 표현 좋구나~
- 여유롭게 보여요.
-그렇지, 여유로운 느낌도 들지......
어린이들에게 낭만적이거나 따뜻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좀 더 찾아보라고 했다. 장면에 들어있는 사물에서 까닭을 찾아도 좋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자기 생각을 독서록에 적기도 하고 짝토의를 하면서 두루 탐구했다. 잠시 뒤 발표를 시작했다.
- 주인공이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까 낭만적인 느낌이 드는 거 같아요.
- 모래시계가 있잖아요. 뭔가 여유롭고, 급하지 않고 옛날 같은 느낌을 줘요.
- 창문에 햇살이 비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져요.
- 식물이 있어요, 주인공이 책도 좋아하고 식물 가꾸는 일도 즐기는 거 같아요.
어린이들은 ppt 화면을 보고 꼼꼼하게 잘 찾아냈다. 작가는 모래시계나 책, 이런 것들을 화면에 등장시키면서 따뜻한 분위기를 내려고 했던 거 같다, 작가에게 이런 걸 물어보고 싶었고 작가의 작업실도 사진으로 보고 싶었다. 아니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보는 활동도 좋을 거 같다. 주인공 고양이의 개성적인 면모를 추론해 보면 재미있을 같다. 빵을 만들고 빵이 부풀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가에서 책을 읽는 주인공은 평소 어떤 장소를 좋아하고 어떤 대화를 즐길까, 이런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다.
빵을 만들기 위해 주인공이 재료를 준비하던 순간에서 두세 시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가 본다. 그리고는 주인공이 하고 있던 일, 만났던 사람, 들었던 음악을 유추해서 연극으로 표현하면 그럴듯할 거 같다. 나는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책 고르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주인공이 고른 책은 식물에 대한 책이다. 고양이는 그렇게 고른 책을 빌린 뒤 마트에 들러 빵 만들 때 필요한 재료를 사 오는 것이다. 어쩌면 이스트일 수도 있다.
남편은 빵 만들기를 좋아한다. 종종 빵을 만드는데 한동안 빵을 만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두어 달 지난 뒤 오랜만에 남편은 빵을 만들려고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했다. 그리고는 빵이 부풀기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부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도 끝내 빵은 부풀지 않았다. 아차, 하고 이스트의 유통 기한을 보았다. 일 년이 넘었다. 효모의 활동 기간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트를 샀다.
이제 주인공은 빵 모양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젠 빵 모양을 만들거예요를 읽고 그림을 펼쳐 보이는 순간 누군가 소리치듯 말했다.
- 아, 안 돼요! 빵에 털 묻어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을 어린이들은 짚어냈다. 집에서 고양이를 길러본 어린이라면 옷에 걸레에, 소파에 묻은 고양이 털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한다. 자연스레 그 생각은 고양이 털이 반죽에 수두룩이 붙어 나는 상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주인공은 소라빵, 우주선빵, 유령빵, 그리고 친구가 좋아하는 지렁이빵을 만든다.
- 아, 친구가 지렁이인가 봐요?
- 지렁이에게 지렁이 빵을!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
어쨌든 모두 기분이 좋다. 빵 만드는 시간이라 그렇다. 빨강과 노랑, 갈색만 써서 큼직하게 펼 친 면에서 반죽하는 장면은 실감을 느끼게 하는 감각 있는 표현이다. 우리 이미 침을 꼴깍 삼키는 중이다. 드디어 오븐에 넣고 빵을 굽는 시간이다. 드디어 빵이 나왔다. 빵 색깔은 갓구운 빵이 내 앞에 있는 거처럼 실감있는 색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오븐이 있는 공간이라면 빵을 구워서 냄새를 맡게 하면 참 좋을 거 같다. 실제로 이 그림책을 보면서 점토로 빵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 마지막 장면이 남았다. 그 장면을 그냥 보여주기 아까워서 뜸을 들였다.
- 이제 마지막 장면이 남았단다. 앞에서 주인공이 친구를 위해 지렁이빵을 만든다고 했잖아. 그럼 마지막 장면은 어떤 장면이 나올까, 한번 상상해 보렴.
바다가 코 앞에 있는 주문진초등학교에서 5학년 어린이들에게 이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5학년 어린이들은 뜻밖에 유아그림책 같은 이 단순한 그림책을 보고 즐거워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 저는요, 고양이가 지렁이 빵하고 따뜻한 코코아를 준비해서요 아파서 학교에 못 나온 친구를 찾아갈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친구와 근처 바닷가로 가서 빵과 코코아를 먹으며 힐링할 거 같아요.
우아, 친구들은 감탄했다. 그럴만도 했다. 이 말을 한 친구는 수줍음이 많은 남자 어린이로 평소 말이 없었다. 스스로 손을 들어 발표를 하는 일도 없었다. 이 날은 모둠별로 발표할 번호가 있었고 그 어린이는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조용조용 말을 했다.
친구들은 빵뿐 아니라 코코아까지 준비한 점에서 그 친구의 남다른 섬세함을 발견했고 감탄했다. 게다가 그 친구는 집이나 공원, 옥상이 아닌 친구들 모두가 좋아하는 바닷가로 갔다. 어린이들은 왜 자신은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어린이가 보이지 않은, 조용한 매력을 이번 발표를 통해 알아보았다. 이 다음에 여자 친구를 사귀면 분명 다정하고 낭만있게 데이트를 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발표를 마치고 우리는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
- 앗, 친구가 새였네!
어린이들은 방금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감흥이 그리 크지 않은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새가 친구일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그래서 답을 맞히지 못했으니 그 또한 재미있게 여기는 거 같다.
노석미 작가 그림책은 이 그림책 말고도 여러 권 있다. 작가는 밝은 색으로 단순한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 담백한 이야기를 심어 놓는다. 그래서 기분 좋고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