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한 숟가락이 필요하다

고경숙 그림책, <마법의 병>을 읽으며

by 강승숙

어떤 그림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림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재미와 감동은 뜻밖의 공간에서 생각지 않은 사연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래전 일이다. 모든 게 바삐 돌아가는 학교의 12월이었다. 업무나 성적, 평가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전화 한 통이 왔다. 근방 학교의 돌봄 선생님이었다. 그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다고 하면서 돌봄 어린이들에게 한 시간 정도 그림책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해왔다. 어린이들은 저학년 20명 남짓 된다고 했다.


조금 망설였다. 12월은 11월부터 몸과 마음이 붕붕 뜬 어린이들은 날기 시작하는 때이다. 끊임없이 손 밖으로 빠져나가는 어린이를 제어하기에 벅찼다. 그런 때이라 처음 만나는 어린이들과 그림책을 읽는 일이 망설여졌다.


- 12월에 꼭 해야 하는 행사인데 어떻게 안 될까요....


나름 사정이 절박한 듯했다. 할 수 없이 하겠다고 했다. 대신 어린이가 스물을 넘지 않도록 부탁했다. 너무 많으면 책 읽어주기가 쉽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열 명 정도면 좋으련만 그쪽도 사정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강의 날이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읽어줄 책을 골라 놓고 더 나은 그림책을 찾으면 바꾸고 또 바꾸었다. 그림책을 보여주면 그거 알아요, 봤어요 하면서 김 빼는 어린이부터 재미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어린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을 대비해서 강력한 무기를 준비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린이들이 집중할 수 있는 책, 내가 고른 책은 바로 고경숙 작가의 <마법의 병>이었다. 이 그림책을 보여 줄 때 심드렁한 얼굴로 있는 어린이를 본 적이 없다. 이 책 말고도 몇 권 더 준비했다. 아코디언북으로 나온 <개구리일까 아닐까>였다. 그날 수업 분위기를 보면서 골라 놓은 책 중에 골라 읽어 줄 생각이었다.


수업 장소에 도착했다. 교실을 보고 조금 놀랐다. 하나는 스무 명이 아닌 서른 명 넘는 어린이들이 교실 가득 있었다는 것이다. 돌봄 선생님은 저학년 반과 고학년 반을 통합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벌어진 일이라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놀란 거는 교실 사방으로 책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옛날 독서실 분위기가 났다. 아담하고 따뜻하기보다는 조금은 엄격한 공간으로 보였다.


- 우리 어린이들은 책을 많이 읽어요! 여기 오면 바로 앉아서 책을 읽어요.


돌봄 선생님은 어린이 독서교육에 진심이었다. 그 마음이 느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림책이라든가 뭔가 더 따뜻한 공간이 몇 군데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던 것이다. 인형이라든가 그림책이 있었다면 조금 더 괜찮았을 거 같았다.


아늑한 분위기를 위해 급히 책상을 밖으로 빼거나 가장자리로 밀었다. 그리고는 어린이들이 의자만 가지고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게 했다. 그렇게 바짝 붙어있으니까 아담하고 집중할 분위기가 되었다.


다행히 어린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재미있게 놀자며 간단히 소개를 하고 손뼉놀이도 조금 했다. 드디어 그림책을 들어 보였다.


- 얘들아, 오늘 처음 보여줄 책은 <마법의 병>이라는 그림책이에요!


마법이라는 말에 어린이들은 눈빛이 흔들리는 듯했다. 눈빛에는 오, 좋아요! 이런 뜻이 담긴 듯했다. 그림책을 펼치기 전 이야기를 꺼냈다.


- 이 그림책에는 마법사가 나와! 마법사는 병 공장 주인이야. 마법사는 병에다가 뭔가를 넣어. 그리고 그 병은 어딘가로 이동하게 되지.


이 말을 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생각지 않은 질문을 덧붙였다. 전에 담임한 어린이들에겐 이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한 번도 하지 않던 질문이었다.


- 얘들아, 혹시 이 병에 들어가서 어딘가로 옮겨진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요?


어린이들은 다투어 손을 들었다. 누구를 먼저 시켜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저마다 간절한 얼굴이었다.


- 저는요, 할머니가 아버지랑 싸워서 인천에 가서 안 와요? 병 속에 들어가서 인천에 가고 싶어요?


깜짝 놀랐다. 뭉클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속 마음을 드러내는 그 순수하고 절실한 마음 앞에서 그림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어린이들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 거 같았다. 처음 발표한 친구의 말에 힘을 얻은 걸까! 손은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갈 듯 애타게, 높이 들려 있었다.


- 다음 어린이 얘기해 볼까요?

- 저는요,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고 싶어요!


그 어린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서너 명의 어린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발표하려는 어린이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늘고 있었다.


- 우리 그림책도 읽어야 하니까 여기까지 하고......

- 선생님, 저두 말하고 싶어요!

- 저도요!

- 얘들아, 중간에 또 말할 시간 줄 테니까......


이 말을 끝내고 그림책을 펼치려는데 그만 어린이 하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할 수 없이 그 어린이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어린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가며 이혼한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병 속에 들어가서 아버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어린이를 다독여주고 그림책 읽기를 시작했다.


- 이 그림책은 중간중간 납작한 종이를 열면 뭔가가 나와요! 그 걸 선생님이 열어보기도 하겠지만 여러분도 열어 볼 수 있어요. 차분하게 집중하는 어린이는 열어 볼 기회를 얻을 거예요.


그림책을 보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은 몸을 바로 잡으며 반듯하게 자세를 고쳤다.


정필이가 오랜만에 목욕을 하겠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목욕을 씩씩하게 잘하는군요.

그런데 <하하 물비누>를 짜려는 순간,

과연 무사히 목욕을 마쳤을까요? (본문)


- 정필이가 목욕을 하려면 병에서 뭐가 나와야 할까요?

- 물비누요!

- 그렇쵸, 그런데 물비누 대신 뭐가 나올 거 같나요?

- 뭐가 나오지?



어린이들은 처음에 감을 잡지 못했다. 아까 마지막 발표를 하면서 울었던 어린이에게 플렛북을 열어보게 했다.


- 와, 하마다!

- 아, 알겠어요! 마법사가 물비누 대신 하마를 넣은 거네요.


천천히 그림책을 넘겨가면서 플렛북을 어린이들이 고루 열어보게 했다. 어린이들은 플렛북을 열면 뭐가 나올지 맞춰보면서 즐거워했고 한 번이라도 열어 볼 기회를 갖기 위해 애를 쓰면서 차례를 지키려고 애썼다.



어느덧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마지막 장면은 잔칫상처럼 앞에 나온 화면 속 플렛북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아주 작은 모양으로. 우린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눈물과 애닮은 마음, 간절함 속에서 한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 본 어린이 하고 오래전부터 만나온 듯 슬픔과 그리움, 기쁨을 나누었다. 그림책 읽기를 마치고 났는데도 몇 어린이는 쉽게 떠나지 않았다. 아직 마법에서 깨어나지 않을 듯했다. 가슴 한끝이 아릿했다. <마법의 병>을 여러 차례 읽었지만 이렇게 진하고 깊은 감동을 얻은 시간은 처음이다.


교실을 정리한 뒤 돌봄 선생님과 차를 마쳤다. 선생님은 오늘 그림책 수업을 보면서 많이 놀랐고 감동했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얘기한 건 처음이라고 했다. 2년간 돌봄 교실에 다니는 어린이도 자신에게 집안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 그림책의 힘인 거 같아요. 누군가 다정하게 그림책을 읽어주면 어린이들은 하나하나 자신에게 들려준다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고 말이 나오는 거 아닐까요.


선생님은 지금껏 어린이들에게 책 읽어줄 생각을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제는 책을 읽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림책 <마법의 병>을 볼 때면 간절하게 엄마와 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마법의 병을 타고 싶어 했던 어린이들이 생각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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