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2학년 어린이 글을 읽다
일기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쓰는 어린이도 검사하는 교사도 모두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애써서 일기를 쓰고 검사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권 문제가 제기되었고 초등학교에서 일기는 사라졌다. 주제 글쓰기란 이름으로 가정에서 글을 쓰는 과제는 더러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의 일기처럼 속 이야기를 쓰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오래전 문집을 다시 읽게 되었다. 20년도 훨씬 넘은 시절, 인천에서 2학년을 가르칠 때 만든 문집이다. 이제는 서른이 넘었을 그 옛날의 어린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5학년의 언어, 마음과 너무도 다른 2학년 어린이. 퇴임 전까지 5학년을 7년 가까이했다. 그 사이 2학년 어린이의 말과 글을 잊었다.
지금 다시 2학년 어린이를 글로 만나면서 깊은 감회를 느낀다. 여러 어린이들이 있지만 특별히 한 남자어린이, 고태* 어린이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는 한 문장 쓰기라든가 두 문장 쓰기 지도를 하지 않았다. 집에서 일기를 써오게 했고 아침이면 검사를 했다. 2학년이지만 한 문장을 쓴다도 뭐라 하지 않았다. 저학년 어린이 글은 한 문장이 시 같은 문장이 많다. 그대로 좋다.
<학교 가는 길>
오늘은 학교 가는 길이 끝이 없었다. (3월 24일 추움)
<아침>
오늘 아침은 달랑 빵이었다. (4월 9일)
<반팔 옷>
나는 이제야 반팔을 입었다. 그래서 시원하다. (5월 8일 시원하다.)
이 어린이는 3월, 4월은 거의 한 문장씩 쓰다가 5월이 되어서 두 문장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한 문장들이 그냥 좋다. 한 문장에 한 바닥 이상의 진한 마음과 상황이 들어있는 듯하다. 3월 24일, 추운 날 학교는 더없이 멀었을 것이다.
4월 9일 일기엔 아침이 달랑 빵이었다고 쓰여 있다. 군더더기 없는 한 문장이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가 아프거나 늦잠을 잤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글 쓴 어린이의 아쉬움을 느끼기엔 모자람이 없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잘해 준다. 또 건강하시다. 또 나이가 서른여섯이다. 또 형은 좀 혼내고 나는 별로 안 혼낸다. 아빠는 나이가 마흔한 살이다. 어머니는 떡볶이를 잘 만든다. 아빠하고 말다툼은 가끔씩 한다. 또 어머니는 내가 아빠한테 혼나면 위로해 준다. 야단칠 때는 지구 끝까지 들리게 소리친다. 어머니는 회사를 다닌다. 회사는 동사무소다. 집안일도 한다. (5월 28일)
5월 28일 일기는 어머니를 글감으로 쓴 설명글이다. 어머니에 대해 주로 썼지만 형이나 아버지도 언급을 한다. 형과 아버지 관계에서 어머니가 어떻게 글 쓴 어린이를 위하고 돕는지 잘 썼다. 비유적 표현도 좋다. '야단칠 때 지구 끝까지 들리게'라고 썼다. 완곡하면서도 유머스러운 표현이다.
<알사탕과 과일 사탕>
오늘 내가 비상식량이 있었다. 어떤 비상식량이냐면 사탕들이다. 또 어떤 사탕이냐면 알사탕과 과일 사탕이다. 맛은 알사탕은 땅콩, 과일사탕은 사과, 체리, 오렌지 포도, 레몬이다. 맛은 모두 다 맛있다. (9월 18일)
알사탕과 과일사탕을 비상사탕이라고 표현하다니! 정말 귀엽다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때 자주 들르던 친구네 집이 있다. 친구네 가면 중학생 남동생을 자주 보곤 했는데 늘 비상식량으로 조그만 엿을 가지고 다녔다. 그 생각이 나서 더 웃음이 난다. 오래 걸어야 할 때 혼자 집에 올 때, 집을 혼자 볼 때 등 군것질거리가 없으면 더 심심하고 견디기 어렵다. 이럴 때 달콤한 간식거리가 있으면 위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탕은 훌륭한 비상식량이다. 비상식량을 다양하게 갖추어서 행복한 기분이 글 속에 가득하다.
<오늘 학교 늦은 일>
오늘 학교에 늦었다. 그래서 조금 슬프다. 그리고 학교는 절대로 안 가면 안 된다. 또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11시 20분에 점심을 먹는 것이다. 또 친구도 있으니까 학교는 참 좋은 것이다. 난 학교가 좋다. 그리고 학교는 학원보다 아주 좋은 곳이다. (8월 28일)
8월 28일 일기는 이 어린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글쓴이는 지각에 대한 불안함과 걱정을 슬프다로 표현했다. 그렇지만 슬프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털어내려고 한다. 참으로 가상하다.
학교가 얼마나 괜찮고 좋은지를 친구가 있고 급식을 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기막히게 맞는 말이다. 어린이들을 친구 만나러 학교에 온다. 그리고 급식 먹으로 학교에 온다. 학교에 오면 급식표에 우르르 몰려서 무슨 반찬이 나오는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웃음이 터질 거 같은 대목은 학원과 비교해서 학교가 좋다고 표현한 것이다.
<지우개>
오늘 지우개를 학원에서 받았다. 아주 큰 거다. 며칠 쓸 수 있냐면 일 년 내내 쓸 수 있다. 작은 지우개보다. 65일 더 쓸 수 있다. 또 뭐가 그려져 있냐면 피아노가 그려져 있다. 근데 정현민이 계속 지꺼라고 자꾸 우긴다. 또 영어가 써져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1월 6일 기분 안 좋은 날씨)
11월 6일 일기는 이 어린이가 얼마나 섬세하고 꼼꼼한지 보여준다. 큰 지우개는 일 년 내내 쓸 수 있는데 작은 지우개보다 65일 더 쓸 수 있다고 했다. 수학자나 과학자가 되어야 할 어린이다.
<형아 안경>
오늘 형아가 안경을 썼다. 갈색 안경테에 안경알은 가장자리가 황갈색이다. 형아 안경은 동그랗고 좋다. 그리고 눈알도 크다. 형아는 안경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 나도 눈이 안 보이면 형아가 옛날에 쓰던 안경을 쓸 것이다. 그런데 형아가 안경을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 옛날 안경을 쓰고 그때 내가 눈이 안 보이면 새로 안경을 가게에서 살 것이다. 그때 나도 잃어버리면 새 안경을 또 살 것이다. 형아처럼 멋진 안경을 쓰고 싶다. (12월 14일 맑고 추움)
글 쓴 어린이는 형아가 쓰는 안경을 너무나 쓰고 싶다. 그 절실함이 만약에 만약에로 확장되면서 한 편의 동화가 되었다. 문집에는 이만큼의 일기가 실려있는데 이 어린이 일기를 더 싣지 못한 게 아쉽다.
그 어린이가 일기장을 어른이 된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계속 일기를 썼다면 충분히 작가가 되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어린이 일기지도를 하지 않으면서 어린이도 교사도 편해졌다. 그리고 유년 시절 기록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일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라도 어린이의 유년을 기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