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대사전에서, 욕심(慾心)이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설명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욕심을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충족에 이를 수 없는 밑 빠진 독과 같은 통제 불능의 욕구”로 설명한다.
캐나다나 알래스카와 같은 추운 지역에서 서식하는 울버린이라는 동물이 있다. 울버린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유명하다. 올버린은 먹이가 남을 것 같으면, 다른 동물이 먹지 못하게 망쳐 놓는다. 올버린이 보여주듯, 욕심은 이기적인 생존과 연관되며, 잠재적 경쟁자의 생존을 방해하는 기능이 있다.
그리스의 짧은 우화, ‘구유의 개’는 욕심의 이기적 특성을 잘 묘사해 준다.
개 한 마리가 짚으로 채워진 구유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 소, 아기 소가 들에서 일하다 배고파 외양간으로 돌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개는 마치 무슨 고깃덩이나 뼈다귀를 지키듯이 소들이 구유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짖어댔다. 그러자 엄마 소가 “나쁜 개! 자신은 먹지도 못하면서, 배고픈 우리도 먹지 못하게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이때, 농부가 다가왔고 이 개가 하는 행동을 보고는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농부는 개를 때리며 외양간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기적인 행동 특성 때문에, 욕심 많은 사람을 ‘욕심꾸러기’ 또는 ‘욕심쟁이’라 부른다. ‘꾸러기’나 ‘쟁이’라는 접미사는 ‘심술꾸러기,’ ‘천덕꾸러기,’ ‘잠꾸러기,’ ‘변덕쟁이’에서 볼 수 있듯이, 심한 버릇이나 행동 특성을 가진 사람을 부정적으로 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욕심꾸러기는 사회로부터 비난과 미움을 받는다. ‘흥부와 놀부’에서 등장하는 ‘놀부’는 욕심꾸러기의 대표 인물이다. 그런데, 욕심 많은 놀부 없이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가 구성되지 않는다.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正反合)의 모순에 필요한 인물이다. 그래서, 욕심이 사회 발전에 반하는 요소이지만, 경제 구조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반 보에스키(Ivan Boesky)라는 사람은 내부자 거래 스캔들로 유명한 미국 한 주식 거래자였다. 그는 1986년 UC 버클리의 경영대학 졸업식에서 행한 그의 연설로도 유명하다. 이 졸업식에서 보에스키는 “욕심은 옳으며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욕심을 부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월 스트리트(1987)란 영화에서 고어돈 게코(Gordon Gekko)가 욕심을 옹호한 보에스키의 역할을 맡았다. 영화에서 고어돈은 보에스키의 정신을 잘 표현했다.
“욕심은 달리 표현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좋은 것이다. 욕심은 옳다. 욕심은 작동한다. 욕심은 목표를 향해 혁명적으로 전진하게 한다. 그 모든 것 중에서 인생, 돈, 사랑, 지식에 대한 욕심은 인류를 약진시켰다”
사실, 보에스키는 내부자 거래 사기와 관련되어 기소되었고, 3년 반의 수감형, 그리고 기록적인 1억 불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명예도 실추되었다. 그가 많은 돈을 기부한 한 신학교의 건물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말년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위자료를 받아내려고 이혼 소송을 진행했었다.
주식 투자자들을 포함한 자본가 중에,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의 축적을 위한 욕심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자본주의 정신은 부의 축적과 투자를 덕(德)으로 보지만, 결코 욕심을 덕(德)으로 보거나 정당화하지 않았다. 개신교도들의 직업 윤리관은 종교개혁과 함께 형성되었다. 개신교도들은 교회의 성직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직업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공동체 선(善)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러한 직업관의 변화 때문에 많은 개신교도들이 상업에 종사하여 회사를 세우고 투자를 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합리적인 수단으로 공동체 선에 기여하는 자본 축적을 정당화시킨 개신교도들의 직업윤리에 근거하고 있다(Max Weber, 1905). 오늘날, 공동체 선이나 건전한 직업윤리를 무시한 자본 축적에 대한 욕심은 여러 가지 사기와 불법을 낳고 있다.
욕심(慾心)에 해당하는 영어 말은 ‘greed’이다. ‘Greed’란 “무엇인가를 필요 이상으로 탐하는 지나치고 이기적인 욕구”로 설명한다. 욕심은 욕구와는 다르게 이기적인 요소 때문에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누구나 지나친 욕구, 즉 욕심를 느끼고 경험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욕심이 나에게 없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욕심은 통제하고, 절제해야 할 마음이지, 정당화하고 키워야 할 마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