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서에서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대체로 “영혼”으로 번역된다. 일상에서도 “영혼”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본질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spirit”에 해당하는 단어까지 “영혼”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spirit)이 떠나가시니라.”
여기서는 “spirit”을 가리키는 단어가 “영혼”으로 번역되었다. 반면,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서는 같은 단어를 “사람 속에 있는 영(spirit)”이라고 번역한다.
이처럼 같은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영혼”으로, 다른 곳에서는 “영”으로 번역되면, 독자 입장에서는 두 개념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번역은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이해해 온 전통적 신학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이 틀 안에서는 "영"과 "혼"을 별개의 실체라기보다 내면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성경은 때로 인간을 더 복합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 (히 4:12)
만약 "spirit"을 무조건 “영혼”으로 번역하면, "영"은 하나님과의 연결 차원, "혼"은 지성·감정·의지를 담는 중심이라는 성서적 구분이 사라진다. 그 결과 인간 이해가 심리적·영적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인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설명하며, 영은 하나님의 호흡으로만 살아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 존재가 심리적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그러나 영이 새로워질 때, 혼도 새롭게 되고 몸도 건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어야 한다.
나는 오늘 감정에만 반응했는가, 아니면 지혜와 진리의 정신으로 깨어 있었는가?
나는 타인을 볼 때 그의 기분과 겉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안의 깊은 차원까지 존중했는가?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라, 인간 이해와 관계 전반에 영향을 준다.
C. S. 루이스의 말은 이를 잘 요약한다.
“당신은 영적인 존재다. 잠시 동안 육체를 가지고 살뿐이다.”
영과 혼의 균형을 바로 세울 때, 성서가 말하는 사람을 더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