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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발, 협력에서 태어나는 질서

by 남상석

창발이란 무엇인가

창발(emergence)이란 생태계의 하위 계층에는 없는 행동과 기능이 상위 계층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철학, 과학, 생태학, 경제학, 정치학, 조직이론 등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이다.

깊이 뿌리내린 혼이 열매를 맺듯, 창발은 개별 존재가 스스로 빛날 때 서로의 빛이 모여 더 큰 질서를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즉, 창발은 하나의 힘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새로 피어나는 생명의 질서이며, 혼이 세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중요한 점은 창발이 개별 존재 안에 있지 않고, 여러 개체가 모여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자연 속의 창발

자연계는 창발의 예로 가득하다.

벌의 군집은 개별 벌이 꿀을 소유하거나 집을 설계하지 않지만, 전체가 모여 육각형 벌집을 짓고 꿀을 저장한다.

unnamed.png 벌떼의 창발


물고기 떼: 작은 물고기들은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며 자신을 보호한다.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의 떼를 하나의 큰 형체로 인식해 쉽게 공격하지 못한다. 또한 물고기 무리가 햇빛을 반사해 내는 형광은 강력한 방어 수단이 된다.


unnamed.png 물고기 떼의 창발


들풀 군락: 한 포기의 풀은 미약하지만, 무리를 이루면 군락이 되고, 다양한 종의 군락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이는 개체 수준에서 의도하지 않고,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다.

wild flowers.png 들풀 군락

이처럼 창발은 개체의 의도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무리가 함께 생존하는 과정에서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창발의 원리

자연의 창발에는 몇 가지 공통된 원리가 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 하위 개체들은 상위 질서를 고안하지 않는다.

전체 지능: 창발은 무리 전체의 지능과 능력에서 비롯된다.

생태적 유익: 창발은 종 보존과 생태계 유지에 기여한다.

일관성: 동일한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도전 속에서 형성된 마을의 창발

인류의 정착지는 언제나 자연의 도전과 함께했다. 홍수, 폭설, 험준한 산지는 생존을 위협했지만, 동시에 협력과 창의적 적응을 자극했다. 그 결과, 마을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지혜와 공동체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지리산 자락의 다랑논

하동 악양 평사리 마을에 가면 산비탈을 따라 층층이 다랑논이 이어진다. 가파른 땅을 포기하지 않고 층층이 깎아낸 결과다. 봄이면 연초록 벼가 물결치고, 가을이면 황금빛 곡식이 햇살에 반짝인다. 비 온 뒤 고인 물은 구름과 하늘을 비추어 논마다 다른 풍경을 만든다. 이는 단순한 농업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빚어낸 살아 있는 예술이다.

네덜란드의 수상 마을

홍수가 잦은 저지대 네덜란드에서는 물을 단순히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제방과 운하를 만들고, 물 위에 집을 세웠다. 배가 길이 되고 다리가 혈관이 된 도시는 물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존의 질서를 보여준다. 암스테르담 운하 옆에 서면, 물이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었음을 실감한다.

Houses.png 네덜란드의 수상 마을

일본 시라카와고

일본 알프스 깊은 골짜기, 시라카와고는 겨울마다 눈이 수미터씩 쌓인다. 주민들은 눈을 견디기 위해 갓쇼즈쿠리(合掌造り)라는 가옥을 만들었다. 합장하듯 맞잡은 지붕은 눈을 흘려보내고, 집 안에서는 여러 세대가 함께 농사와 양잠을 이어갔다. 폭설의 땅에서 태어난 이 집들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이자 공동체적 생존의 상징으로 남았다.

sirakawago.png 일본 시라카와고

인간의 도전에 대한 응답

자연만큼이나 다른 인간의 도전, 곧 전쟁과 침입, 약탈은 마을을 규정했다. 위협은 방어적 정착을 낳았고, 공동체 결속을 강화했다. 때로는 새로운 문화의 융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한산성

서울 근교의 남한산성은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했던 이곳은 단순한 요새가 아니었다. 성 안에는 행궁과 사찰, 민가가 함께 자리했다. 숲과 성벽이 맞닿아 하나의 풍경을 이루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지켜냈다. 지금도 가을 단풍과 겨울 눈 덮인 성벽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전란 속에서 공동체가 버텨낸 기억이 서려 있다.

namhansansung.jpg 남한산성

그리스의 절벽 마을

산토리니의 절벽 마을은 해적의 침입을 피하려는 선택이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지어진 하얀 집과 푸른 지붕은 처음부터 미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생존의 전략이 세월을 거쳐 세계적인 경관으로 변한 것이다. 오늘날 여행자는 ‘낭만의 섬’을 보지만, 그 뿌리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적 정착이 있었다.

Santorini.png 산토리니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사마르칸트와 카슈가르 같은 오아시스 도시는 수많은 세력의 침입을 겪었지만, 동시에 언어와 종교, 예술이 교차하는 교류의 장이 되었다. 충돌은 고통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명 융합의 계기가 되었다.

결론

자연의 도전은 환경 적응을 요구했고, 그 속에서 협력과 창의성이 발휘되었다. 지리산의 다랑논, 네덜란드의 운하 도시, 시라카와고의 가옥이 그 증거다. 인간의 도전은 침입과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방어적 정착과 문화적 융합으로 이어졌다. 남한산성, 산토리니,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는 그러한 응답의 다양한 형태다.

결국 마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도전에 대응하며 형성된 창발적 사회·문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전통 마을의 풍경은 위협 속에서 태어난 창조적 응답이며, 그 안에는 지혜와 협력, 연대의 기억이 담겨 있다.

협력은 어떻게 질서를 낳을까? 그 해답은 바로 이런 창발의 역사 속에 있다. 창발은 자연만의 현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본질적 특징으로, 집단적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를 빚어낸다. 그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날 도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도시가 단순한 경제적 공간을 넘어, 영적 창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다음 글에서, 우리는 도시와 영성의 관계를 살펴보며 그 가능성을 탐색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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