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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석 Oct 01. 2023

‘섭리’란 무슨 뜻일까?

         교회를 다니게 되면, ‘섭리(攝理, Divine Provision)’라는 말을 가끔 듣게 된다. ‘섭리’란 무슨 뜻일까? 섭리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교리 용어로써,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이에 관계된 모든 일들을 돌보고 다스리심을 뜻한다. ‘섭리’는 다른 어떤 교리 용어 보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어사전에서 ‘섭리(攝理)’를 “대신하여 처리하고 다스림” 또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으로 설명한다. 섭리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providence’인데, 통상적으로, 신적(divine)인 인도(guidance)와 보호(care)를 뜻한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King James Version), 사도행전에 ‘providence’란 한 번 나오는데, 변사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의 지도력을 칭찬할 때 한 말로써, 하나님의 섭리와는 거리가 멀다. 공동번역, 빌레몬서에서 이 말이 한 번 나오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다른 한글 성경에서 ‘섭리’란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섭리’란 하나님의 다스림 또는 통치에 관한 기록에서 추론해 낸 교리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구원설,’ ‘예정설’도 성경에서 추론해 낸 교리 용어인 것과 같다. 섭리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구원, 통치, 그리고 통치 원리를 포함하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 문답서를 통하여, ‘섭리’란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기독교 개신교회는 ‘웨스트 민스터 대요리 문답(문 18)’을 교리 문답서로 사용한다. 대요리 문답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게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며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피조물과 그 행위를 다스리시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을 포함한 하느님의 창조물은 고유의 선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상태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만물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아직도 다다라야 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보며,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를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02)

         이와 같이,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물을 배려하고 다스린다는 섭리 교리를 믿는다. 섭리 교리는 만물에 대한 신의 선하신 뜻과 계획, 그리고 사랑의 배려를 포함한다. 우주 질서에 대한 신의 섭리에 대한 대칭되는 관점은 운명(fate) 일 것이다. 섭리란 기독교의 한 교리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포함한 우주 만물을 배려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믿음이며 세계관이므로 아주 중요하다. ‘섭리’는 아마 다른 어떤 교리(예, 삼위일체, 예정설)보다 기독교인 신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교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계 1:4, 단 4: 17, 32, 롬 9:5, 시 47:7, 48:7, 욥 25:2, 11:36, 창 1:1). 만약,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린다면, 어떤 원리나 질서로 다스리실까? 즉, 하나님의 섭리에는 어떤 원리나 질서가 있을까? 한 국가에도 통치 원리가 있고, 법질서가 있다. 하늘과 땅을 만들고, 섭리하신다면, 아무 원리나 질서 없이 섭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섭리하시겠지만, 변덕스러워서 그 질서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영원하지만, 인간 이성의 빛으로 조명할 수 있는 원리도 있을 것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에서 발견하고 추론할 수 있는 섭리의 원리와 질서를 정리해 보았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섭리하신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만물 속에 각각 내재하는 법칙을 심어놓았다(욥기 26:7, 39장, 사 28:29). 자연 속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자연과학(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에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법칙들이 있다. 인간 심리와 행동에도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법칙들이 있다. 인간 심리에 내재한 기본 욕구와 동기는 경제, 교육과 같은 국가 경영에도 적용하지만, 섭리의 방법이기도 하다. 응용과학(의학, 공학, 건축학, 경영학, 농학)은 자연에 내재하는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고 적용해야 인간 삶이 향상한다.

         만물에 내재하는 자연법칙은 가장 기본적인 섭리이며 만물이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유지되도록 한다. 아무리 높은 영적인 진리도 기본적인 자연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연법칙을 배우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만약, 어떤 가르침이 자연 질서나 법칙을 무시하면, 그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다. 사람은 이 땅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스리고 돌보는 책무를 위임받았다. 그래서, 수리시설, 주거시설, 편의시설이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또한 정권과 지도자를 통하여 백성을 다스리신다. 모세를 통해서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고, 여호수아를 통해서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양치는 목동 다윗을 불려내서 나라를 굳건하게 세우고 번영하게 하셨다. 여러 예언자, 선지자를 통하여서 백성을 지도하셨다. 심지어, 페르시아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을 쓰셔서 백성을 포로로 잡히게 하셨고, 고레서, 다리우스, 아닥사스다와 같은 왕들을 통해서 백성의 귀환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라를 섭리하신다 (시 103:19, 단 5:21). 사람의 방법과 다르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기도, 폐하기도, 그냥 두기도 하신다 (단 2:21, 4:17). 그래서, 백성은 순기능을 하는 정부나 정부의 관리를 존중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행 23:5, 롬 13:7). 정권과 권위는 섭리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돕겠다는 약속도 있고 (사:41:14),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도 있다 (시편 22:19, 38:22, 44:26, 70:1, 108:12, 마 15: 25).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을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보할 때,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힘, 용기, 의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직업 소명은 중요하다. 보통 사람은 직업 소명을 통해서 섭리에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통해서 건전한 직업을 선택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장례식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고인이 사회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지 않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직업이나 생업을 통한 섬김과 봉사를 남기고 간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양심(良心)은 하나님 섭리의 도구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혼에 양심을 심어놓으시고,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여 살 수 있도록 윤리와 도덕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신다. 양심에 관해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위를 보면 별이 빛나는 하늘들, 내 안을 보면 도덕적 법이 있다. 지평선 너머에 가려진 것을 찾거나 억지로 추측하는 노력이 필요치 않다. 나의 양심으로 바로 이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양심은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한다. 양심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뉘우치기도 한다. 또한, 양심으로 참된 것을 선택하고 거짓된 것을 물리친다.

         양심은 자신에 대한 선악 간의 판단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구성원에 대한 선악 간의 판단을 하고 사회적인 행동을 한다. 영어 단어, ‘conscience(양심)’의 어원을 보면, ‘같이 알다’라는 뜻이 있다. 한 사회는 선과 악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연대하여 공유한다. 그래서,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전문가 단체는 일정한 윤리적 표준이나 윤리적 선언을 기초로 해서 운영된다.

         이와 함께, 양심은 자율과 신용에 근거한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신용 거래, 수표, 후불 제도, 자율 체크아웃 등은 시민 양심에 근거한 경제 활동의 예이다. 자율과 신용에 의한 경제는 통제와 불신에 의한 경제보다 훨씬 효율적이며 간단하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여러 번 양심을 언급하였고,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 제이 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한 문서는 양심을 ‘하느님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놓은 한 법’으로 규정하면서 “양심의 소리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며, 악을 피할 것을 말해 준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양심의 기능을 살펴보아서, 양심은 하나님 섭리의 도구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섭리하신다. 

         사람은 영(spirit)을 가진 혼(soul)으로 창조되었다. 혼으로서의 사람은 자연에 내재하고 인간 사회에 형성된 윤리, 도덕, 법과 규칙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과학적인 진리로 한정되지 않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 1:3). 하나님의 말씀은 규례, 율법, 약속, 계시, 지혜를 포함한다. 규례는 공동체의 보건, 위생, 건강에 관한 규정이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공동체의 사회법과 윤리를 규정하고 있다. 모세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인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동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 가치, ‘경천애인(敬天愛人)’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십계명과 동양의 윤리, 도덕률은 모든 사회의 성문율과 불문율의 법원(法源)이 된다. 하나님 말씀의 섭리는 이러한 법원에 근거한 법제정과 법시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한 사회를 정의롭고 평화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의 백성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격려와 위로가 된다. 또한, 약속과 계시는 그의 백성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게 역사한다.    

하나님은 의와 공정으로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요4: 24), 사람의 본질도 영이다 (창2: 7). 영의 특징은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족, 마을, 사회,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생존한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 가치는 의(righteousness)와 공정 (justice)이다 (시 97: 2, 99: 4, 사 9: 7, 마23: 23).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서로 놀다가 싸우게 되면, “That’s not fair!” “That’s not right!” 하면서 싸우거나 대든다. 의와 공정은 놀이 집단, 인간 사회, 하나님 나라의 기본 가치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이기도 하다 (겔 33: 20, 시 96: 13, 98: 9, 행 17: 31). ‘옳다,’ ‘그러다,’ ‘의롭다,’ ‘불의하다’의 기준은 공동체의 유익(有益)이나 해악(害惡)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용서‘를 성경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 없는 ‘사랑’과 ‘용서’는 있을 수 없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 85: 10- 11).


         사람의 ‘진실’된 자세가 신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다. ‘공정’이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시내처럼 흐르는 사회가 곧 ‘평화’로운 사회이다. ‘사랑’과 ‘용서’는 ‘정의’와 ‘공정’ 위에서 적용되는 보다 높은 영적 가치임을 알아야 한다. ‘정의’와 ‘공정’ 없는 공동체에 ‘사랑’과 ‘용서’는 공허한 소리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금식, 기도는 아무 의미 없는 종교적인 겉치레에 불과하다. ‘정의’와 ‘공정’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본 가치이다.

하나님은 직접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이지만,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다. 성경은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수많은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창 19), 홍해 앞 기적 (출 14), 마리아에게 전해진 복음 (눅 1: 26-30),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남 (행 12), 등 많은 예들이 있다. 에스겔서에서는 “내가 직접 내 양 때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겔 34:15).”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은 사람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거나, 흔하지 않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고사성어는 섭리의 순서를 적절히 표현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과 기도로 일어날 수 있다.


페르시아 왕국의 관원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만이 정적인 모르드개를 죽이고 그가 속한 유다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은 자신의 생각대로 잘 진행되었다. 그는 왕의 허락도 받고 유다민족을 죽이는 조서도 만들어서 전국으로 보냈다. 자신의 집에는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서 높은 장대까지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사람들은 대성통곡하였다. 유다 사람인 왕비 에스더와 그의 시녀들도 금식하며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결국,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신적인 개입이 일어났다. 하만은 자신이 세운 장대에 매달리고, 유다 민족은  해방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높임과 명성을 얻는다(에스더 1-10). 이와 함께, 백성들의 존경을 바탕으로 모르드개는 유다민족의 해방과 귀환에 지도력을 발휘한다.


         사람을 통한 섭리가 먼저이고, 하늘의 직접적인 개입이나 기적은 나중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사람과 함께 섭리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수 1:9),” “용기를 내라 (요 16:33),”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라 (학 2:4-5)”라고 격려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초월적이다.

         하나님은 해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내려 주신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의 섭리를 이루신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마음이 돌처럼 굳어졌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넷살은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고레스, 다리우스, 아닥사스다 왕은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섭리의 범위는 선과 악, 개인, 마을, 국가, 인류의 역사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왜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하나님은 악의 활동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15: 8).”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창 50: 19).”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가룟 유다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아니었지만, 가룟 유다의 배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 있다고 본다.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가룟 유다가 자신의 의지로 악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심지어 악의 활동에 가담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악의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은 섭리의 신비이다. 사람이 이성의 빛으로 조명할 수 없으므로, 신비라 부를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상식으로, 선한 사람이 복을, 악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상식을 초월한다. 욥기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준다.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께 불평하고 대들었다. 당연히, 그의 친구들은 욥의 자세를 꾸짖고 나무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고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의 방법보다 높았다 (이사야 55: 8-9).” 사실, 욥기의 주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섭리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한 젊은 부부가 어린 딸을 잃었다. 이웃들과 함께, 그 가정을 방문했지만, 위로의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엄마는 어떤 위로의 말도 듣기를 원치 않았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의롭고 착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가? 전쟁, 천재지변, 질병, 선천성 장애, 영아 사망, 등을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로써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불행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와 배려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치만, 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을 벗어난 죽음이나 불행한 일이 있을까? 누가 하나님의 뜻과 예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이해를 초월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요일 4:16), 하나님의 섭리도 당연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하나님은 이미 심어 놓으신 자연 질서를 거슬러 역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했다. 하지만, 사랑의 이유로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장애인을 낫게도 하셨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셨다. 이러한 섭리의 방향을 이 땅에서는 기적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섭리는 선과 악을 동시에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섭리는 불행과 죄를 통해서도 선을 도출하실 수 있다. 지금, 나에게 닥친 일이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예정을 믿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을 믿는 것이 초월적인 섭리에 대한 바른 자세이다 (롬 8: 28).

섭리 신앙

         섭리신앙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은 바뀌지 않으며 주위의 상황과 상관없이 날과 때가 되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과 예정을 홀로 이루지 않고, 하나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통해, 사람과 함께 이루신다. 섭리 신앙은 사람의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섭리신앙에 대비되는 관점은 운명론(fatalism) 일 것이다. 운명론은 사주팔자(四柱八字), 행운 (幸運), 불운(不運)과 같은 운명을 믿으며, 삶의 자세를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섭리 신앙과 대비된다. 운명론은 세상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불려 일으킨다.

         하지만, 섭리 신앙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를 믿는다. 문제는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섭리를  내가 믿는가?”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일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일을 알아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일을 하나님의 돌보심의 손길에 맡겨 드림으로 안심할 수 있다.

         섭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영적인 보호, 돌봄, 공급, 예비, 중재, 개입, 등의 모양으로 인간사에 나타난다. 섭리가 아니면,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의 타락, 예수의 죽음과 부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연결할 수 있는 이해와 표현이 없다. 섭리가 없다면, 지구는 광대한 우주에서 하나의 잃어버린 별이 된다. 섭리가 아니면, 전쟁, 재난, 질병을 극복하고 이어져 오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희망적으로 설명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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