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료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2'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기안84의 모습은 정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짐을 꾸린다.
심지어 출발 전날 짐을 싸는 것도 아닌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10분 정도를 투자하여 짐을 챙긴다.
아침에 일어나 티셔츠 몇 개와 바지 한벌, 위생용품 등 10박 이상의 여행 일정에 작은 가방 한 개로 마무리하고 공항을 향해 나선다. 여행지에서 조우한 친구들은 서로의 짐에 놀란다. 한 명은 너무 많아서, 한 명은 너무 적어서.
여행 짐을 챙기는 수고로움을 덜어낸 자리에 설렘의 기분을 더 챙겨갈 수 있을까? 이제는 설렌다는 느낌을 온전히 받기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소풍 전 날 가슴 떨려 잠 못 이루는 시절은 너무 많이 흘렀고 여행 준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약간 무덤덤해진 설렘의 기분을 아이가 대신해 준다. 여행 가기 일주일 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고 "거기서 뭐 해?" "수영장은 있어?" "며칠 동안 가는 거야?" 질문을 연발한다. 며칠 내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꾸 생각이 나서이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자기 전 매일 밤 말을 한다. 감정은 많이 눌려있지만 나도 그날을 너처럼 자주 생각한단다.
짐을 챙기는 것은 미래의 여행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있을 일, 없을 일을 예상해 가며 준비를 한다. 남보다 먼저 생각하는 이유는 이 짐가방의 주체가 오롯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큰 캐리어 안에 3인의 짐을 넣어야 하지만 3인 각자가 짐을 챙기는 것이 아닌 1인이 그 부담을 안고 있다. 남편은 본인 옷만 챙기는데 그마저도 가끔은 양말이나 속옷 같은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으므로 엄마의 계획대로 모든 걸 준비해 간다. 자연스레 빠지거나 의도치 않게 챙기지 못한 것들은 결국 나의 책임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내 개인용품, 공용용품, 그리고 각자의 짐이 다 들어있는지 체크하다 보면 2시간이 훌쩍 간다. 그 2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빼곡히 상상해 가며 필요할 수 있는 것들을 캐리어에 넣는다.
최근 시도해 본 MBTI에서 분명 즉흥형(P)이었는데 이렇게 철저한 준비라면 나는 즉흥적인 계획형(PJ ??)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꾸준하게 계획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 즉흥적으로 계획을 했다가 안 했다 하는 뭐 이런 거. 여행의 준비에 있어선 잠시 계획형으로 돌아선다.
이번 여행은 일본 오사카였는데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은 나의 건강이었다. 하필 여행 전에 이석증이 잠시 왔었고 독감까지 걸려 컨디션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게다가 유니버설스튜디오가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였는데, 과연 그곳에서 나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입장권만 사서 들어가거나 혼자 다른 곳을 여행할까도 고민했지만 멀리까지 왔는데 경험을 안 하기에는 손해 같았다. 결국 "모든 놀이시설을 동행하여 탑승하겠다."라고 선언하고 환불 안 되는 티켓팅을 마치고 나니 출발 몇 주 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유니버설스튜디오는 2번 정도 방문을 했었다. 그때에는 참으로 즐겁게 모든 시설을 이용했다. 놀이기구를 싫어하던 나도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라 주변에 추천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도 타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최신 VR 기기와 4D 콘텐츠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났다. 게다가 빠르고 무섭다는 것도 티켓에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즐겁게 여행을 마치려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할 거라면 징징거리며 주변인들의 기분을 망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여행 몇 주 전부터 걱정을 가득 안고 심호흡을 하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했다. 가기로 했으니 마음을 잡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한 가지쯤 마련해 두어야 했다.
집에서 지낼 때는 특별히 걱정해 본 적 없는 소화불량, 두통, 아이의 열, 넘어져서 피가 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유니버셜에서 멀미가 날지도 모르며, 긴장한 탓에 위경련이 올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그래서 걱정을 덜어줄 방법으로 약을 조금 더 챙겨가 보기로 했다.
기본 소화제, 진경제, 위경련제, 멀미약, 두통약, 이석증약….
지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집어삼킬 수 있는 거리에 이 약들을 구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약국에 가서 한 움큼 상비약을 구매하여 캐리어에 넣고 일부는 소분하여 작은 가방에 넣었다. 무언가 대책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난 지금에 와서 보면, 반은 기우였고 반은 필요한 것들이었다. 여행 내내 위장약이 필요했고, 멀미나 이석증 같은 것은 발현되지 않았다. 무사히 유니버셜의 모든 기구를 탑승했다. 이렇게 많이 걸을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그에 대한 대비는 하지 않았지만 근처 가게에서 휴족시간을 사서 발바닥에 붙이니 어느 정도 해결은 되었다.
기안 84처럼 작은 가방을 들고 10박이 넘는 여행을 계획한다면 나의 기우는 사라질까?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 설렘보다는 해야 할 일과 준비할 것들이 더 늘어나는 기분은 왜인지 슬퍼지기도 한다.
설렘보다 큰 세심한 준비과정은 오롯이 나만 아는 비밀이다. 나의 여행 동반자 남편과 아이는 복잡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지만 3인의 짐을 챙겨야 하는 나는 책임감이 앞선다. 언젠가는 가볍게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날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