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파게티 랩소디

by 페일핑크


일하다 문득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 졌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디서 냄새가 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짜파게티라니.

어릴 때도 이렇게 짜파게티가 당기는 날이 있었다.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

라고 말하면 짜파게티가 딱 나왔던 어린 시절. 라면을 언제부터 혼자 끓여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초등시절 할머니가 짜장라면을 끓여준 그날이 생생하다.


우리 집에는 긴 손잡이가 하나 달린 양은 양수냄비가 있었는데 라면 딱 1개만 끓일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높이의 냄비였다. 1인분만 가능한 냄비라서 라면이 다 되면 냄비 채로 먹거나 큰 대접에 담아내어 먹었다. 특히 짜장라면에게 그 냄비는 최적이었다. 일정시간 끓다가 물을 버려야 하는데, 긴 손잡이를 잡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버릴 수 있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그날은 유독 짜장라면을 먹을 생각에 흥분되어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오늘 저녁은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

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 할머니는 지체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친절하고 다정한 타입이라기보단 요즘말로 츤데레에 가까웠다. 조금 까칠한 성격을 내보이면서도 손녀딸이 하고 싶다고 하면 욕을 하면서라도 해준다. 그날도 아마


"이놈의 가시나! 주는 대로 좀 처먹지"

뭐 이런 욕 한 번을 내뱉고 부엌으로 들어가셨을지 모르겠다. 평소에 하도 들어서 그런 말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내보내는 기술이 점점 늘어 욕 따위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저 관심사는 부엌에 들어간 할머니의 짜장라면이 잘 끓고 있는가. 언제 먹을 수 있는가였다.


짜장라면이 주는 설렘은 그런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입안에 넣어 짭짤함과 달콤함을 만끽하고, 1인분의 양이 다 사라질 때까지 집중해서 먹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짜장라면에 들어간 건조 고기와 야채 고명을 씹는 생각마저도 맛있었다.


레시피에 따르면 5분에서 7분 정도면 짜장라면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 시간을 못 참고 할머니의 요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부엌을 향해 속도감 있게 들어갔다. 할머니의 등 뒤에서 요리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내게 내내 등만 보이고 있던 할머니는 마침 요리를 마치고 냄비 채 짜장 라면을 줄 생각으로 냄비를 든 채 몸을 돌리던 찰나!


냄비와 내 이마 관자놀이가 부딪히고 말았다. 내 키는 할머니보다 한참 작을 때여서 냄비를 들고 있는 높이와 이마가 아주 잘 맞닿을 수밖에 없었다. 냄비에 들어있던 뜨거운 액체와 면이 내 얼굴과 어깨춤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날은 짜파게티고 뭐고, 얼굴에 곱게 간 감자를 붙이고 누워있어야 했다. 어른들은 밤부터 아침까지 병시중을 했다. 여자아이 얼굴에 흉이 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간 감자를 여러 번 고쳐 발라주었다.


지킬 앤 하이드처럼 한쪽 얼굴만 데어서 붉은 자국이 일주일은 갔던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지금은 흉터하나 없으니 이 민간요법은 꽤 효과가 있었다.


즐겨보는 유튜브 중 한국 할머니와 미국인 2세 손녀의 일상을 콘텐츠로 만들어 운영하는 채널이 있다.


"할모니~ 불닭 라면 끓여줘~~"

라고 말하며 시작하는 영상은 조회수 400만 회가 넘을 만큼 인기다.

손녀의 요청에 할머니는,

“또 귀찮게 하네" 하며 싫은 소리를 한마디 하고

냉장고에 있는 갖은 재료를 넣어 매번 다른 라면을 정성껏 만들어 낸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손녀가 맛있게 먹고 끝나는 게 이 콘텐츠의 전부이지만, 할머니의 냉털 신공이 매번 눈길을 끈다.


"할머니, 짜파게티 끓여줘~"

라고 해도 끓여줄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삼시 세끼 챙겨주는 회사 식당에서 가끔 짜. 치. 계라는 이름으로 점심 메뉴가 올라온다. 몇 백인분의 면을 끓이고 짜장 가루를 넣어 소스를 빠르게 볶아 코팅한다. 완성한 짜장라면에 치즈와 계란 프라이까지 올리려면 꽤 시간이 걸리는지, 짜치계가 나오는 날이면 줄이 길게 늘어선다. 짜치계는 꽤 인기 메뉴지만 나는 이상하리만큼 회사 점심 메뉴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남이 차려주는 점심은 영양소가 잘 구성된 식단으로 받길 바라는 마음인가 보다.

구내식당의 짜.치.계


대신 혼밥 식사로서, 취향을 한껏 반영한 라면 끓이기로 나만의 시간을 즐긴다. 남이 끓여주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고 하던데, 라면이든 짜장라면이든 직접 끓여 먹는 것을 좋아한다. 면의 익힘 정도, 국물의 양, 고명 추가 등 나만의 선호를 잘 살려서 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짜장 라면은 면이 마르지 않게 소스가 촉촉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국물을 남겨야 하고 소스를 비빌 때는 시판 짜장가루 한 스푼을 더 해 먹는 게 가장 맛있다. 혼밥 하는 날은 라면을 떠올리며 무엇을 넣어 먹을지 고심한다. 집에 아무도 없는 날 짜장라면에 고춧가루와 트러플 오일을 왕창 넣어 비벼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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