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회사에서 국문학과 출신 상사와 일한다는 것

by 페일핑크


"근속 1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소정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꼭 받아 가세요!"


며칠 전 인사팀에서 축하 메일과 함께 선물을 보내왔다. 어느새 15년이구나. 한 5년만 버텨보자 하고 들어온 회사였는데 올해로 15년 차가 되었다.


20대에는 업무 경력 10년 정도면 엄청난 베테랑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배울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자꾸만 튀어나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느새 실수가 한 가지씩 나와버리곤 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 이 정도는 봐주어야지 싶으면서도 가끔 스스를 책망한다.



문서를 작성할 때는 깔끔한 레이아웃을 선호한다. 목차의 구조, 들여 쓰기 위치, 블릿의 형태. 집 정리에는 소질이 없지만 가상세계에서 만큼은 어질러진 꼴을 보기 싫어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문서 작성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기본 중의 기본, 문법 오류를 놓치기도 한다. 군기가 빠진 말년 병장 느낌이랄까.


처음 이 팀으로 이동했을 때, 팀원들은 상사의 문서 피드백을 안줏거리 삼았다. 기획서의 내용이 아닌 표현방식, 비문, 작성 규칙 등 예상치 못한 수정 요구에 돌직구를 맞아 힘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니, IT 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국문학과 출신 상사였다. 디테일한 상사의 피드백에 한숨소리가 여럿 들렸다.


기획서는 보통 개발자와 디자이너 간의 소통을 위한 문서로 활용되기 때문에 무겁게 작성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문서가 윗선으로 넘어가면, 내용과 더불어 텍스트의 오류까지 노출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6년이 넘은 베테랑 기획자였지만, 교정이나 윤문 따위는 놓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상황을 감지했음에도, 동일한 상황을 나 역시 겪을 수밖에 없었다.


"띄어쓰기가 다 안 맞네요."


아차 싶었다. 계획 보고하는 날이라 문서를 큰 화면에 띄우고 설명하는 자리였다. 문서는 사전에 전달을 드린 상황이었는데 제일 먼저 건넨 한마디가 띄어쓰기 오류였다. 미리 읽어보면서 문법 오류가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낯 뜨거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아 네, 제가 최종 체크를 안 했네요. 다시 확인해 보고 수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논의를 마치는 시간까지 머릿속에는 '띄어쓰기... 띄어쓰기...' 단어만 맴돌았다.


마감하는 과정에서 디테일 한 끗 차이가 나타난다. 정말 여러 번, 몇 시간 동안 하나의 파일을 검토하며 빠진 내용은 없는지, 방향에 맞게 작성이 된 것인지 확인을 했는데 맞춤법 체크는 뒷전이 될 때가 있다. 어디 대회에 나가는 글이었으면 당연히 하루 종일 탈고를 했을 텐데.


교정, 교열, 윤문.


책 쓸 때나 쓰는 용어인 줄 알았다. 대학시절 리포트를 제출할 때도 저 세 가지는 교수님의 요구사항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랬던 걸까. 한국인이 한국어를 잘 쓴다는 확고한 신념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하거나 기피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쓰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글을 쓰고 탈고를 위해 문장을 곱씹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안 맞는 논리, 비문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과정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요즘 생성형 AI에게 가장 자주 질문하는 것은 "문법적 오류를 체크해 줘", "띄어쓰기가 알맞은지 확인해 줘", "조금 더 개선된 문장으로 바꿔줄 수 있을까"이다. 이렇게나마 완성도를 올리려고 부단히 질문을 던진다. 이제 AI는 우리 팀원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제야 비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던 것들에 신경을 쓰니 에너지는 더 들지만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팀원이 문서 검토 요청을 하면, 내용을 확인하고 윤문을 한다. 이전보다 외부에 발행되는 문구가 많아진 탓도 있다. 지난 팀 주간회의에는 문구 작성하고 꼭 소리 내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뭐 이렇게까지 하나 하며 속으로 욕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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